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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우와 무대―화려하고 좁은 문―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명우와 무대―화려하고 좁은 문― 名優와舞臺―華麗하고좁은門―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한은진 韓銀珍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3 昭和十六年三月
면    수 222 (222)
기사
名優와舞臺
(第 二 回)
★華麗하고좁은門
韓銀珍
★情熱은强한것
李錦龍

華麗하고좁은문
豪華船 韓銀珍
나의 俳優生活十年記를 쓰라는 通知를 받기는 했읍니다마는 저는 이것을 쓸만한 資格을 갖지못했읍니다. 그것은 저에 俳優生活이래는게 겨우 只今까지 四年조금된 까닭입니다. 그것이나마 오래면 쓰겠읍니다마는 여러분들에 生覺과는 어그러져 따분한 이야기가 될까해서 주저하는 동안에 「原稿締切り」는 닥처오고해서 할수없이 아까부터 펜을 들고 앉었읍니다마는 지나간生覺은 나지않고 뒤뜰 오동나무잎이 바람에 우수수하고 떨어지는게 보일다름입니다.
어렸을때부터 映畵와 演劇音樂을 좋아했던關係로 어떻게한번 映畵界에 進出해불까 어린이혼자 마음만태우고 있었읍니다마는 그예 朝鮮映畵界에 있어서 저이들같은 抱負를가진 사람들을 養成시킬만한 養成所 하나 없었읍니다. 至今도 없읍니다마는 各撮影所가 新設되고 映畵生産도 많어저서 저에 初心때보다는 硏究할 期關이 많이있다고봅니다.
그래 映畵界進出할 機會만 엿보고 있었읍니다마는 서울長安 한구석에 있는 조고마한 映畵狂을 파내주실분이 있을이가 만무합니다. 그러는동안에 不幸이라할까, 多幸이라할까 나에 동무 重男이라는(只今은 故人이되었읍니다마는) 同窓生이 있었는데 그女子 역시 저와 똑같은 抱負를가지고 있는 까닭에 日常 둘이 行動을 가치하며 映畵館에 푸로가 갈니먼 第一着으로 求景을 하고와서는 그映畵가 좋으니 나뿌니 主演女優에 化粧이 좋다니 유치한 映畵評에 꽃을 핀일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生覺이남니다.
[사진] 한은진으로 추정
이얘 우리들에게 機會가왔다. 하고 허둥대며 뛰어들어온 重男孃에 얼굴에는 喜色이 돌고 明朗한눈이 더욱 明朗해지며, 이얘 어제 新聞 보지못했니 아니 文化人이 될라면 每日 新聞을 빼지않고 보는게야, 하며 가졌던 新聞을주며 이것보아, 東洋劇場에서 男女俳優를 募集한다는 廣告面을 보이면서 빨리 가보자는 재축이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좋은 챤쓰가 目前에 달하였읍니다마는 別로 기쁘지도않고 나역시 異常하다고 生覺했읍니다.
그理由는 내가 希望하는것은 演劇界가 아니고 映畵界인 까닭이었읍니다.
이얘 우리가 希望하는것은 映畵排優지마는 이번 機會에 演劇俳優가 될것같으면 映畵界進出하기는 現在立場보다는 더 빨을게 아니냐, 하는 말에 그러면 가볼까, 時日도 있지않읍니다. 昭和十一年五月十六日 午后七時頃에 東洋劇場事務室로 두處女가 큰希望을 조그마한 가슴에 품은 대담하게 찾아들어갔읍니다. 그때 東劇專屬劇團靑春座가 朝鮮에 最高峰이라고 主張하던것만큼 內容에 있었던지 演技陣에있어어던지 그時代에 자랑할만한 團體이었읍니다. 저에 동무와 저는 이劇團에 入團하게되어 이게 저에 俳優生活第一步이었읍니다. 面幕하나 사이를둔 觀客席과 舞臺 사이에는 이렇게 차이가 있을까한것은 入團한 數日만에 느끼게 되었읍니다. 저는 想像치도못한 別世界에 들어오고 마랐구나, 그것은 觀客席에서 舞臺를보는 제에 生覺과는 좋은點으로던지 나뿐點으로던지 너무나 틀였읍니다.
이 조그마한 舞臺內에도 自然的으로 흘러나려오는 規則이 생기여 觀客席과 面幕으로 國境을 둔 舞臺라는 社會가 完全히 建設되어있는걸 느꼈읍니다. 入團한지 數日後 舊正月을 마지해 企劃部에서는 正月손님을 相對하기爲하여 春香傳을 上演하기로 決定이되여 化粧室揭示板에 配役表가 發表되었읍니다.
「銀珍」하고 劇團幹部俳優한분이 옆에서 求景하고있는 저에뒤에와서 부르기에 돌아다보았더니 요번 春香傳에 配役이 나완네, 이말을듣자 숨이끊어질듯이 가슴이 뛰며 인제야 왔구나, 좋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걱정이되어 入團한게 원망스러워지기도 했읍니다.
役은 春香傳 행수 妓生이었읍니다.
어떻게하나, 或 실수를하면 어떻게하나 하며 對詞 한마디없는 役을 맡어가지고 걱정을 하는동안에 어연간 初日이 오고말았읍니다. 제가 처음 化粧室에 들어올때 여러俳優들이 수염을붙이고 입술을 빩가케 칠하며 化粧하는 것이 읍웃고 異常하더니 이제는 나도 化粧을 하게되었구나. 발라보지 못하던 도-랑을 얼굴에다 발르고있자하니 「銀珍이 오늘이첫舞臺지」하고 幹部俳優한사람이 물었다. 「어때 처음舞臺 오르기前心境이라는게, 아마 오늘은 저녁밥도 못먹었을걸 가슴이 두근거려서. 舞臺나가서 客席에다 엉뎅이 두지말우」,하구 또한 俳優가 말을 거들었다.
事實 나는 오늘 집에서 나올때 저녁을 먹지못했다. 수까락을 들고보니 입맛이없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배가 부른것같고 해서 그냥 수까락을놓고 劇場엘 온것이다. 그러면 只今말한 俳優들도 自己네들에 걸어온 實踐生活에서 經驗한 말이로구나하고 生覺할때 當身네들도 이럴때가 다있었구나 그러면 누구던지 한번식 격거나가는일인줄알때 多少나마 安心이 되었읍니다.
出演할時間은 점점 가까워옵니다. 내가 出演할場面은 李道令이 暗行御史를 해가지고 南原下學道生日잔친날 御使出頭를해서 烈女春香을 求하는 春香傳 終幕인데,그場面에 술분는 妓生役이었읍니다. 豪麗한 舊樂伴奏(蓄音機)에 징소리가 들리자 舞臺와 觀客席에 國境인 面幕이 千斤萬斤이나 되는듯이 올나가기 始作할때 나에 가슴은 더욱이 울렁거리었읍니다.
고개를 숙이고 앉았자니 「이妓生술따르게」하는말에 고개를들자 全身에 더운기운이 확돌며 깜깜한 客席에서는 千餘名에 曙光나는 눈동자가 나만 보는것같으며 내가 只今 술을 딸으는게 어색하지나안나 或시 그妓生 틀였다하는 「야-지」나 나오지않을까 하는동안에 劇은 進行되며 御使출도信號에 북소리가나자 언뜩生覺나는것은 아까 舞臺나올때 누군가 내귀에다 가만히 일러주기를 출도信號북소리만 나거던 도망질해서 나와야지 그렇지않으면 力卒에게 얻어만는다하고 일러주던걸 生覺하고. 하맛트면 얻어마질번했구나하고 뛰어나오자 力卒들이 뛰어들어와 舞臺는 수라장이 되고말았읍니다.
舞臺를나와 겨우 한편구석에가 남모르게 긴한숨을쉬고 있으려니깐 重男이가力卒에게 얻어맞고 눈물을 흘리며 옆에오는걸볼때 웃읍기도하고 한便으로는 이것이 世上절문男女들이 憧憬하는 俳優生活이로구나하고 生覺할때 나도모르는 感情이 솟아나올나와 限없이 쓸쓸해지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내가 처음에 舞臺에 올나갈때 氣分과 좋으나 나뿌나 많은 役을 맟이고난뒤 그갑분한 氣分이라는건 무엇이라고 펜을들어 表現할수없는걸 알데 俳優生活에도 좋은데가 있으나 하는것을 느꼈읍니다. 第三者로 觀客席에서 求景하시던 분들은 그劇中에서 제가하는 役같은것은 問題에도 안하였을것입니다마는 出演한 本人은 이런苦生을하여가며 저에첫舞臺를 無事히 經過하고말았읍니다.
그後五十餘日後靑春座는 京城中央公演을 마치고 地方公演으로 떠나게되었읍니다.
午後十一時 南鮮行列車를탄 一行은 그이튿날아츰 八時頃 團體引率者命令대로 車에서 내리고보니 여기가 湖南線群山驛이었읍니다.
列車內는 座席도 없을뿐 아니라 두번이나 乘換을하고나니 지난밤 車內에서는 全員이 잠한숨 못잔건 事實인고로 驛前에 準備되어있는 自動車를타고 旅舘으로 들어가자 旅舘房門앞에는 누가써부첬는지(先行이한것) 座員氏名이 붙어있어서 各各 自己房에 들어가게 幹旋을 해놓았기에 저역시 이름 붙은房을 찾아들어가 피고한몸을 쉬려할제 演出部先生님이 부른다는말을듣고 찾아갔더니 銀珍수고좀해야 되겐네, 다른게아니라 XX孃이(XX孃이라는분은 그때 靑春座에 最高幹部女優였읍니다) 오지않었으니(イナオリ)어떻게허나 京城과달라서 代役할사람을 곧 구할수두없으니 오늘 레파도리는 一週日前內부터 宣傳으로 群山市民과 約束을 해놓은것이 되어서 바꿀수도 없고하니 演出部責任者로 銀珍이한테 役을 돌리니 對詞을 들여다 보라하면서 脚本을 주기에 대담하게 아무말도하지않고 받아들고 내房으로돌아왔읍니다. 이것이 機會로구나, 피곤한몸을 쉴틈도 없이 脚本을 들여다보기始作했읍니다.
그날밤 化粧室에서는 銀珍이가 저代役을 해낼가 모두들 安心이 안되는 氣色이 이사람저사람 얼굴에 나타났씀니다. 더구나 相對役되는 俳優는 自己걱정같이 기까게에 對한 注意를 몇번이나 말해주었읍니다. 中央公演時에 이劇을 上演할때 舞臺옆에서 二三次보아두었던 기역이 새삼스럽게 떠올으기 시작하며 貧弱하나마 演技푸란을 多少 세우게되었읍니다. 그동안 舞臺에 數十回 出演한經驗이있어서 어느程度까지 舞臺에呼吸이라던지 觀客席에 雰圍氣를 알게는 되었읍니다마는 이런大役을 맡아보기는 처음인關係로 舞臺에나가니 普通때보담 더한층 緊張이되는것이 對詞에 구속을 받게되니(對詞를못외여서 푸롬페다를받자하니) 마음에 거울에다 내自身을 빛춰볼만한 餘裕도없으니 多少나마 세워놓은 演技푸란데로 進行될이가 만무하였읍니다. 舞臺上下手「植込み」뒤에서는 「樂屋」俳優분들이 總出動하여 걱정해보는분 흥미를가지고 보는분 실수를希望해보는(役다름으로) 눈초리가 오히려 觀客에 눈초리보담 몇배나 무서웁게 보이는동안 演劇은 進行되어「야지」는 면하는同時에 끗이났읍니다. 「案外良かつなね」演劇部先生님이 한숨을쉬며 舞臺를나오는 저를붙잡고 말을하자 「韓さん御苦勞樣」여기저기 舞臺옆에서 求景하던 분들이 人事를할때 처음으로 多少 마음을 놓게되었읍니다.
이런機會가 있는後로 種種 役도 좋은것이 나오고 여러先生에 좋은指導를 받는동안에 벌써 一年이 지나 五ケ月이되고 말았읍니다.
出劇時間을 기대리느라고 化粧을마침 先輩俳優諸氏들은 スト-ブ옆에 모히여앉아 지나간이야기며 演技評들을할때 일상 들려오는 말이있으니 나는 그말을 들을때마다 無心히듣질않었읍니다. 그말은 나는 演劇을 十年을 했다느니 十五年을 했다니 하는말입니다. 나도 十年後에 저렇게되면 어떻게하나.
朝鮮藝術界를 모르는나는 너무도 希望이 큰까닭이었읍니다. 이런生覺이 日常 멀어져서 떠나지않을때 이劇團에 進步성이없고 發展이없는걸 알때 하루이틀 가는날이 무서울다름이었읍니다. 이團體에 企劃이라는것이 經營者들에珠盤에서부터 쪼게나오는 方針이 되어서 俳優들에게는 無理한點이여러가지 생기자, 自然히 不平이 얻어나고 말었읍니다. 그不平이라는것은 來日初日에 上演할 脚本을 오늘 作者가 끗을 못내어 옆에는 檢閱臺本을쓰는 文藝部員이 붙어있어서 作者손에서 넘어오는 原稿紙는 檢閱臺本係를것처 演出部員에 손을거친後 俳優들손에 오게된다 그때야 自己役對詞를 뽑게되니 이것이 잘되어야 그날밤 演劇이끗날때 對詞를베끼고 조금만늦게되면 그날밤은 劇場에서 새우게되어 겨우 對詞를 다뽑게될때는 그이튿날 아침이 듸고마니 한번 마추어볼時間도없이 막을열게됩니다. 그러니 이演劇은 演劇이아니라 朗讀會가 되고마는것이 事實입니다.
練習時間을 두어야한다. 演出을 받어야한다. 晝間演劇을 하게되니 俳優들에 健康問題도 크다는 여러가지 不平이 있는中에 좋은演劇 새로운演劇을 하기爲한 精神下에서 몇先輩諸氏가 새로운劇團組織企劃이되어 靑春座에있어서는 進步가없다고 느끼는 演技者全部는 새로생긴 劇團에 加入하고말았읍니다. 저도 그때에 加入者에 한사람이 되었읍니다. 이새로운劇團이 中央舞臺이었읍니다.
처음으로 練習時日을 豐富하게 두고 對詞을 完全히 외여서 演出을 받게되니 하루하루 나에演技가 進步되는것같고 團體에 雰圍氣가 統一되어서 規則있는 舞臺生活을 經驗하게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때에 저이들은 저이들이 하는 演劇이 새로운 演劇이다 演劇다운演劇을 하는 團體라했으나 觀客에게 너무 進步된演劇이었었는지 그時代에 觀客에게 맞지않는演劇이었었는지 이中央舞臺演劇을 들여다 보아주는 觀客이 漸漸 적어지자 多大한經費를 들여서 公演을하나 結局에는 決損을 보게되니 財政問題에있어서 타격을 받게되고 말았읍니다. 一同이 全力을 다해서 熱과努力으로 싸왔읍니다마는 家庭을 가진사람도있고 父母를 여인사람도 있으니 거기에 生活問題가 『크라스압푸』될때 할수없는 事情으로 創立五ケ月만에 解散상태에 이르게 되었읍니다. 그리고보니 이團體 저團體로 團員이 헤여지고 저는 그때 새로 創立한 人生劇場에서 交涉이있어서 人生劇場으로 가게되고 말았읍니다. 그時代에있어 多少나마 演劇界革新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團體역시 中央舞臺와같은 精神下에서 組織되었읍니다. 『白花』를 創立公演으로 府民舘에서 마치고 이團體역시 中央舞臺와같은 지경에 빠저 昭和十三年三月十三日 東亞日報社主催에 第一回 全鮮演劇콩쿨을 最后로 解散하고 말았읍니다. 달연되지못한 演技를가지고 콩쿨에 出演하여 女子演技賞을 받게되었으니 이것은 全部가 人生劇場諸先生님 德澤으로 生覺합니다.
希望하던 映畵界進出할 期會를 얻게되었읍니다. 前부터 二三次 交涉이 있었던 關係로 演劇콩클를 最後로 人生劇場을 解散하자 昭和十三年三月初旬頃에 저는 朝鮮映畵株式會社에 專屬俳優로 入社를하게되었읍니다.
演劇은 그동안 經驗을 얻어서 素人은 면했읍니다마는 映畵는 이것이 또 第一步이었읍니다. 映畵舘スクリン과 映畵雜誌에서 얻은 多少에 知識外는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諸先生님에 指導와 幹旋으로 조금식조금식 무엇을알게되자 撮影이 始作되었읍니다.
原作을 アタブテツヨン해서 「本讀み」을한後 구랑크가 始作되자 처음으로 카메라앞에 스게되는 저는 自身을 잃고말았읍니다. 그것은 演劇과 映畵가 너무나 차이가 있는까닭입니다.
演劇에는 劇에 事件이 順席대로 進行되며 出演하는 演技者들은 演技물랜을 세워 그 事件에 雰圍氣에 마추어 劇은 進行되지만 映畵는 約束한 스토리는 있으나 撮影隊아니 監督에 便利上 스토리에 順序가없이 撮影되는 까닭입니다.
只今은 조금이나마 알게되어서 撮影은 이렇게 하지안하면 안된다는것을 認識하였읍니다만은 그때는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울어 스토리 前後氣分을 認識하지 못하고 監督의 命令대로 카메라 앞에서 슬푸지않은 우름 웨웃는지 모르는 웃음을 웃는 동안에 이것을 撮影한 필림은 現像室을 것처 編輯者에 손으로부터 撮影記錄과 脚色臺本으로 가지고 끊고 있고해서 映畵가 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白紙로서 카메라 앞에 슨 저에 第一回作品은 完成되었읍니다. 映畵演技者라는것은 한 커트へ에 테크니크가 必要하고 生命이 있다는걸 알게될때 다음 作品에는 하고 내自身에다 約束을 했읍니다. 그러는동안에 一年半이나 지났으나 다음作品에 企劃아 스지않고 하니 演技者로서 一年이나 쉬고보니 다른사람보담 뒤떨어지는것같고해서 그러면 노는동안에 演劇이라도 해볼가해 朝映을 退社하고 東洋劇場에 가서 演劇을 해보왔읍니다마는 원래 몸이 弱한편이 되어서 地方엘 댕기고보니 몸이 몹시 쇠약해서 劇團과도 關係을 끊고 撮影할 期會를 보고 只今은 집에서 쉬고있읍니다.
이게 저에 四年조금된 俳優生活記에 아무트란인이라고 生覺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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