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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원에 피는 꽃들(기2)―최승희 편―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예원에 피는 꽃들(기2)―최승희 편― 藝苑에피는꼿들(其二)―崔承喜篇―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B기자 B記者
출처정보 중앙 中央
연    도 1934-03 昭和九年三月
면    수 100 〔100〕
기사
朝鮮이나흔天才的舞踊家 東洋一의舞姬가되기까지!

朝鮮이나흔-일즉이 그歷史의 품안에 안어보지못한- 天才的舞踊家! 崔承喜孃의 近況은 어떠한가?
再再昨年 即 一九三一年이접어들며五月에左翼文士 安漠君과鴛鴦의 百年佳緣을 맷고 市內八判洞一隅에서 사랑의 보금자리를 꿈이고잇든 그가 昨年봄에 恩師 石井漠氏의 門下로다시 復歸하게되매 朝鮮의 數만흔퐨들은 앞으로 그의嬌艶한 姿態를 다시 舞臺우에서 차즐수없게됨을 저윽이 섭섭해 하얏다
그後一年이지난 지금에 崔孃의 消息은 어떠한가? 이는누구나 다알고십고듯고싶은 消息中의 하나가 되지않을수 없을것이다
[사진](六歲時의 崔孃)
最近 日本의 新聞紙와 雜誌는 爭先하야 崔孃이 恩師에게로 復歸한 爾後의 非常한 進境 그의 圓熟해진 演技를 最上級의 讚詞와함께 大大的으로 報道하고잇다
그中에도 永田龍雄 川端康成과같은 日本의 權威잇는 舞踊批評家들은
「崔承喜의 舞踊은 朝鮮人의 生活感情을 가장深刻하게 가장沈痛하게 表現하는데成功하얏다 그의演技는 벌서 圓熟의 境地에들어선지오래다 日本의 舞踊家로 崔承喜의 演技를 따를者는 지금엔 發見하기에 困難하다……」
「崔承喜의 놀랠만한 進境에는 感歎하는수박게없다 그의 演技는 老鍊해지고 이제는 틀(型)이 박인 舞踊家가되얏다 지금의舞踊家中에서는 崔承喜가 가장 큰 期待를 갓게한다……」
等等의 批評과 讚詞를 時時로 發表하고잇다.
이것을 보면 한동안
主婦로서의 運命을 이제는免하지못하게되엇구나!
하고 閨房에 파뭇칠 그의 藝術을 哀惜히 녁이든 一部의 부지럽슨 豫想도 고만 깨어지고말엇다
지금 그는 大成에의 野心을품고 最後의 「뻬스트」를다하고잇다 名實이 相符한 東洋一의 舞姬! 世界가屈指하는 大舞踊家에의 躍進! 이두가지가 現在에 그가품고잇는 心境의두기둥(柱)이리라!
그러면 崔孃이 오늘의 榮譽잇는 名聲을얻기까지의 걸어온길은 어떠하엿든가? 躍進하는 崔孃의 最近消息을 接하며 筆者는 그의數奇한 前半生을 紹介하고 싶은 衝動에 사로잡히고말엇다
◇끼를굶고登校◇
一九二六年 일은봄 崔孃의 나희 겨우 열다섯이되어서 淑明女高를맛치든해이다 卒業式을 몇칠 압두고 그는 좁은가슴을 태워가며 卒業後의일을 걱정하얏다.
「얘! 承喜야! 너 卒業後엔 무엇하련」
自己보다는 全部가 年長者인 班友들이이러케 물으면
「글세! 어떠케하면 좋을지몰으겟서」
「넌아즉 나희도 어리고 하니깐 얼마간 집에서 놀아도 괜찬치안니! 結局우리가 탈낫다」
「탈은 彼此一般이지! 낸들어데 집에서 놀수잇다든!」
하고 崔孃은 그들의 質間에 힘없는 應酬를하얏다.
그러나 崔孃의 그當時 그心情을 알어주는사람은 한사람도없엇다.
집안이 貧困한것 나히가 어린것 이두가지는 그의압길을 決定하는데 커다란 障碍가되얏다.
첫재 崔孃의 집안은 그當時 中産階級의 沒落過程을 밟은그뒤끝이라 學費만하드라도 三四學年때에는 잇해동안 學校에서 授業科를 免除하야 주엇스며 卒業때 臨時하여서는 끼니를굶고 學校를 通學하게 되얏스니 崔孃이 남과같이 앞으로의 計劃을 세우지못하고 煩悶하는것이 無理가아니엇다.
그리고 둘ㅅ재로 崔孃은 나히가 어리엇다. 설령 집안이 넉넉하야 學業을 繼續하게 된댓자 年齡關係로 上級學校에서 入學을 許可할는지가 問題이엇다.
그래서 崔孃은 이러한 煩悶을하는 中에 卒業狀을 밧게되얏스니 비록나히는어렷슬 망정 타고난 才操와 聰明은 그로 하여금 優等生으로 校門을 나서게 한 것이다.

[사진] (大正十五年 淑明女高普 卒業當時)
[사진] 그의 創作舞踊 오리엔탈땐스의 포-스

卒業後 집안에 들어안진 그는 한시를 마음을 놋치못하얏다.
「어떠케하면 나도 내趣味잇는 方面으로 工夫를 더 계속할수가잇슬가!」
아모리 窮理를하여 보앗스나 이少女의 갈길은 좀처럼 열릴것갓지가 아니하엿다.
이때이다 그의 큰옵바되는 崔承一氏가東京에서 돌아왓다 崔孃에게는 둘도없는말벗이다.
「옵바! 난어떠케해야 조화요?」
「글세말이다 넌 唱歌도잘하고 遊戱體操같은것도잘하고 그걸보면 音樂工夫 같은것을 더시켜주엇스면 조켓다마는 어데집안 形便이 그러케되니?」
鐵石같이 미덧든 옵바의 對答도 시언치는안헛다. 하는수 없시 崔孃은 平素에 自己를 귀애하든 母校의 先生한테로 쪼처갓다 그當時 成義慶氏 金永煥氏 같은분은 崔孃을 가장사랑하얏다고한다.
그래서 學校當局에서 校費生으로 京城師範學校에 주선하야 入學試驗을보아 合格은 되얏스나 結局은 年齡不足이란 理由로 그곳도 如意치는 못하얏다.
이러케 煩悶과 憂鬱가운데에서 지내든中 崔孃에게는 結局 한개의좋은機會가닥처왓다.
그것은 그當時 日本서 人氣를 獨占하고잇든 石井漠氏가 三月中旬에 來京하야 京城日報의 主催로 公會堂에서 第一回公演을 開催하는 同時에 그의朝鮮에 對한 感想談을 同紙에 發表한中에
「……朝鮮人으로 내弟子가 되고십허 하는少女가잇다면 한名쯤은 데리고 가겟다……」
이記事를 첫번눈익여 읽은사람은 崔孃의 옵바이엇다. 그러치 안허도 事情만 許諾한다면 누이를 東京이나 外國으로 留學을 보내어 그의藝術的 素質을 充分히 發揮시킬機會를 주엇스면 하든次에 이記事를 보고는 卽時 當時의 京城日報 學藝部長寺田氏에게 쪼차가서 自己누이 동생이야기를 하고 石井漠氏에게 紹介해주기를 請하얏다.
勿論여긔에는 崔孃의快諾을 바더가지고 한것은 말할것도없다.
이래서 石井漠氏와 崔承一 男妹間에는 「앞으로 三年間을 敎育期間으로한다. 그後에는 朝鮮으로 다시돌녀 보낸다」
는契約을 寺田氏 入會下에 締結하고 三月二十五日 아츰車로 日本으로 떠나기로하얏다.

◇驛頭의悲劇一場面◇
이 契約을 맛치고돌아온 崔孃은 頑固한家庭의 承諾을 어떠케 맛흘가가 큰걱정거리가 되얏다. 처음에는 音樂工夫를하러간다고 속이엿스나 나종에는 承一氏가 그의누이를 팔어먹엇다는 惡宣傳까지퍼지게되어 한동안이때문에 承一氏의 立場이 困難햇든것은 勿論 집안이 발칵뒤집혀서 親戚과 母校의 先生까지 들고일어나 反對를 하얏다.
그러나 한번 決心햇든일을 周圍가 反對한다고 中止할수는 없섯다. 崔孃은 出發期日인 三月二十五日 아츰에 京城驛으로나갓다 石井漠氏와 같이 二等車깐에 들어가 或은집안사람이 쪼처오면 어쩌나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鎭定하고 안젓스랴니까 막汽車가 떠날 臨時하야 崔孃의母親李氏가 母校의 先生들과같이 플랫폼에서 崔孃을 찻다가 窓박그로 내다보는 男妹의 얼골을 보고는 고만목을노코 우는 一場悲劇까지 일어낫든것이다.
玄海灘의 거친 물결에 부닥기며 東京까지가는 동안에 崔孃은 끗이없는 울음과 무서운 孤獨에 잠겨잇섯다. 어머니 膝下를 떠나 異城에 오게된것이 元來 處女의 行動으로서는 너무나 大膽한짓이엿다 그러나 이왕 몸을숨겨서 東京까지온 以上 그는 울음과 孤獨으로만 歲月을 보낼수밖에없섯다. 先天的으로 艶麗한 姿態를갓고 聰明한 頭腦와 藝術에對한 天稟을가진그로서는 不過몇달이아니가서 石井漠氏의 寵愛를 一身에 걸머지게되얏다.
그래서 그해가을에 東京서 初公演을하얏슬때에는 「金魚」라는것을 춤을 추어서 非常한 歡迎과 喝采를 바덧스니 이때부터 그의演技는 舞踊批評家의 입에서 올으고내리엇다.
[사진]舞踊詩 月光曲의 포-스
그리고 그다음해 三月에는 朝鮮으로나 와서 崔孃의 鄕土訪問 第一回公演이 公會堂에서 開催되얏스니그때에는 「챠이콥흐스키」의 「세레나-드」를 獨舞하야 滿場의 觀衆을 心醉케하얏스며 當時 崔孃의母校인 淑明女高에서는 校長以下 敎職員生徒一同이 그의成功을 祝賀하는 意味로 이會席에 參席하야 花環을 주고 開會한後에는 校長 李貞淑氏가「가꾸야」로쪼처들어와 「네 재조가 이러케 훌늉하게 됏드란말이냐?」고 感嘆不己하는等 이박게도 滯京十餘日에各方面에서 바든强盛한 待接은 참으로 宏壯하얏다 故鄕에서 豫想外의 大歡迎을 밧고 東京으로 돌아간崔孃은 그後얼마지나서 서울잇는 옵바承一氏에게로 한번은「…옵바 암만해도 이곳에만 줄창잇슬수는 없슬것가태요 처음생각에는 先生한테 춤만배우면 고만이려니 하고 單純한 생각을 품어왓스나 最近에와서는어쩐일인지 先生의하는일이 모다 自己의 機關을 維持하여가는데만 熱中하는것같고 舞踊에對한 理論的方面같은것은 弟子들에게 가르켜 주기를 無誠意하게하는것같어 차라리 이대로만 나간다면 脫退하는것이 나흘것이 아닐가요? 그러고 나는 달리舞踊의길을 밟어야 할것가터요………」
하는 內容의편지를 보내왓다. 그러나 이것이 追後하야 石井漠氏의 妻弟 石井小浪과같이 石井漠門下를 脫退하는 心理的動機가 될줄을 누가알엇스랴?
◇石井漠門下를脫退◇
崔孃이 石井漠氏와의 三年間契約을 完了하게되는 一九二八年 夏期의 일이다. 얼마전부터 石井氏의 妻弟小浪은 각금그에게차저와서 알에와같은 不平의 말을끄내노코갓다.
「나는 암만해도 先生과는 分立을 안할수없다. 나는 그동안 先生을 爲하야十餘年間을 犧牲 하얏스나 先生은 이를몰라주고 自己의 利益만 取한다.
前者에도 내가 이만하면 舞踊硏究所하나 쯤 내줄만하지 않으냐고 提議하엿것만 그는 들은 척만척하얏다. 이것을보면 先生의 藝術的良心이라는것도可히 짐작할수잇지 안흐냐?」等 等……
이런말이 崔孃의 귀에 들어온지 멫칠이못되어 例의 有名한 石井小浪 崔承喜等石井漠門下 脫退事件이 일어낫다. 그것이 바로 七月달이다.
그래서 崔孃은 完全히 石井漠과도 손을 끈케되엿다. 그러나 東京 바닥에서 아모 後援者도없이 舞踊硏究하네 하고 주저안즐수도 없고해서 그해 가을로 바로 朝鮮으로 나와버렷다.
나와 노코보니 結局은 손에 일이 잡히는것이라고는 아모것도 없섯다. 이때도 하는수없시 옵바되는 承一氏의 힘을빌어 한동안은 露西亞에가면 工夫를 할수잇슬가하고 露國領事舘을 通하야 留學 涉을 해보앗스나 이도如意치 못하고 그해가다기울랴는 十二月中에 다시 某目交紙 主催로 公演會를 開催하여 거긔서 한七百圓假量의 資金을어더서 崔承喜舞踊所를市內御成町에 新設하고 朝鮮內의 새로운舞踊普及運動을 일으켯다.
그래서 그때부터 한三年동안은 南朝鮮北朝鮮 都會處에는 全部 巡回를 하얏스니 이때의 崔孃의 舞踊에 對한 精神에는 從來에 직혀오든 精神과는 質的으로 다른 一大轉換이 잇섯다.
即 朝鮮사람의 生活感情을 捕捉하야 그것을 强烈하게 表現하자는-다시말하자면 石井漠時代를 떠나서 崔承喜自身의 獨特한 時代를 創造하랴는 생각이 猛烈히일어낫든것이다. 그래서 舞踊을 直接現實生活에 連結시기고 그것을 線으로 一般大衆에게 表現하자는 意圖下에서 地方巡回와 서울公演에 全心力을 다햇든것이다.
그러나 이생각도 오래가지를 못하고舞踊硏究所는 門을닷게 되얏다. 그것은 처음에는 一部에서 崔孃의 意圖를 贊成하고 觀衆만하드라도 한동안은 崔孃의 看板에 好奇心을끌어 公演巡回의 收入이겨우 硏究所維持費만은 뜨더쓸수잇슬 形便이엇스나 그것도 三年이란 오랜歲月을 끌게되니까 一般의 理解와 好奇心도 漸次로 薄弱하게되야 結局은 門을닷지 안흘수없는 悲運에 빠젓든것이다.
◇夫君의勸告로再起◇
못처럼 計劃햇든 事業도 三年이못가서 水泡로 돌아가매 崔孃의 失望은 여간한것이아니엇다. 그러나 이좁은 朝鮮땅에서 아즉 舞踊에 關하야는 一般的으로 常識조차 缺如된 이좁은 版局에서 그成功을바랫다는것부터 崔孃의 違算이엇다고 看徹할는지 몰으나 어쨋든 當時의 그로서는 어쩌는도리가 없엇다 그래서 그는모든것을 斷念하고 잇든次에 突然 그의옵바의周偉으로 그의身上에는 結婚問題가 擡頭하얏다.
그러면 相對의 男性은 누구인가? 當時日本早稻田大學 在學中으로 카프盟圓인安漠君이 그사람이다 같은 갑프盟員 朴英熙氏의 仲媒로 雙方은 無條件하고 意合하고 말엇스니 이두사람의 幸福된 結婚生活이 八判洞一隅에서 始作되기는 再再昨年五月淸凉舘에서 華燭의 盛典을 擧行한 爾後부터의일이다.
이리하야 두사람의 結婚生活은 一年동안을 서울을 舞臺로하야 展開되얏다. 그러나 夫君安漠君은 愛妻의 偉大한 藝術的 天稟을 그대로 묵힌다는것은 너무나 哀惜한일이라하야 暗然히 崔孃의 再起를 勸告하고 自己는 結婚翌年인 再昨年봄에 單身으로 東京으로 건너갓다.
그래서 崔孃도 비록 結婚은혓스나 다시한번 舞臺에 나스겟다는 勇氣를어더가지고 再起할 機會를 엿보고잇든中 그해가을 石井漠氏가 다시 京城에와서 公演하고 돌아가는길에 그때에도 例의寺田氏等의幹旋으로 옛날의 先生과 弟子는깨끗이 感情을淸算하고 崔孃은 石井漠舞踊硏究所의先生으로 招請을 바더가게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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