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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서 해제(3)―청구영언 편자와 해동가요 편찬 연대에 대한 재고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고도서 해제(3)―청구영언 편자와 해동가요 편찬 연대에 대한 재고 古圖書 解題(3)―靑丘永言編者와海東歌謠編纂年代에對한再考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조윤제 趙潤濟
출처정보 조선어문학회보 朝鮮語文學會報
연    도 1932-04 昭和七年四月
면    수 15 15
기사
\靑丘永言編者와海東歌謠編纂年代에對한再考
-靑丘永言과海東歌謠解題補筆-

筆者는本報第二號에靑丘永言編者金之澤은 海東歌謠의金天澤과同人異名일것을말하고 「之」와「天」과의사이에는그어느便에誤記가있을것을推論하야두었다. 또本報第三號에는海東歌謠編纂年代에關하야 編者가肅宗朝사람인것으로미루어보아 肅宗二十九年일것을亦是推測하엿다.
元來이와같은書籍의編者라던지 그編纂年代를論하는 것은 朝鮮에있어서는容易한일이아닌대 前日그와같이말한것은한推論에지나지못함을 明言하엿지마는 그래도 安心치못하엿다. 다만靑丘永言編者만에關하여도 金之澤과金天澤은同一한사람이고 金之澤의「之」는「天」字의草體가後人의謄寫者손에之字로變形하엿슬것은 容易히斟酌할수있을것이지마는確實한根據를얻지못하면서도 그를斷言하는 것은 原本을無視한空論일것을두려워하야 다만金之澤, 金天澤은同人인듯하고 「之」와「天」과의사이에는그어느便에誤記가있으리라하여두엇다.
그後이에對하야아무도말하는이가없어 筆者自身도적게安心이되든次에 近日새로이이方面의文獻을얻어보니 充分히 나의說을돕는듯하고 또若干의錯誤도있엇스므로 다음에먼저의推論을明言으로밧구는同時에 一部의訂正을하여두고자 한다.
첫재靑丘永言編者에對하여는 前에도말한바와같이海東歌謠의金天澤과同人이라볼수있는대 그理由는새삼스리이에말할必要는없으나 靑丘永言의序文을쓴鄭潤卿의글이亦是海東歌謠의金天澤歌後序에올녀있으니 이點에對하여는거의疑心을품을餘地가없다. 그러면남은問題는金之澤, 金天澤그어느 便이옳을것인가하는것인대 二本이다寫本이고 다른證據를 얻지못하는以上 우리는亦是마음대로決定할수없으나 오직이問題를解決할열쇠를가진이는鄭潤卿에있다하겟다.
鄭潤卿은名은來僑 號는浣岩或은玄翁이라불으는肅宗朝사람이다. 一時는製述官으로朝廷에仕進한일도있엇스나 차라리民間詩人으로後世에이름을얻엇다. 李宣叔의評에依하면다만詩뿐이아니라文章에있어서도亦是卓越한點이있고 더욱이 琴操를旁解하고長歌를질겨서 그微妙한點에達하엿다하는것으로보아 우리文學史上에도빼지못할重要人物일것을짐작할수있으나 내가特히여긔浣岩을 힘있게紹介하고자하는 것은 自己自身이民間詩人일뿐아니라 또民間詩人더욱이時調作家라던지 當世有名한歌客들을무던히愛護하는同時에 그傳記같은것을記錄하야 後世에까지그이름을남겻다는 것이다.
大體로李朝의肅景英正時代는 朝鮮文學더욱이詩歌의勃興期이라할만큼 많은歌客詩人이輩出하야一代의文化를빛냇섯다. 그러나朝鮮文學이當代의文筆家 記錄家에等閑되엿는關係上 이方面의文獻은大端히零星하다. 일로보아鄭潤卿같은 이의朝鮮文學史上에남긴功勞는決코적다할 수 없다. 오늘날傳하는그이의文集인浣岩集은 不過二三冊子에 지나지못하나 그內容은朝鮮文學愛護의精神이充滿하고 當代의그方面記錄이滿載되엿다. 이들을一一히여긔紹介치못하게됨은筆者의萬萬遺憾으로生覺하는바이나 다시後機會로미루고 그中直接 本問題에關係를가진一部를紹介하면 海東歌謠에金天澤歌後序로記載된글이 本集卷之四序文條에보인다는 것이다. 일로因하야海東歌謠의誤字落書를訂正할수있을뿐아니라 그題目에 『金生天澤歌譜序』라하야 틀님없는 「天」이라쓰이었다. 本文集은寫本이아니고印本임으로 우리는前文獻의어느것보다도信用할수있으나 일로보아海東歌謠의金天澤은誤記가아닌것을알겟고 따라서靑丘永言의金之澤이海東歌謠의金天澤과同人異名인것에疑心이없다면 자연히「之」는「天」으로訂正될것도틀님없는事實이다. 그러면나는靑丘永言의編者는金天澤이라하여둔다.
兼하야그編纂年代까지를말하여둔다면 나는前日그解題에 英祖四年이라하여두엇다. 勿論 이에對하여는틀님이없으나 다시그理由를明白히하여본다면 編者金天澤의傳記가未詳한 以上 그編纂年代는亦是 鄭潤卿의序文으로決定이될것인대 鄭潤卿은그文集의序文을쓴李宣叔 (名은天輔, 肅宗二四-英祖三七) 과同輩인듯하고 그跋文을쓴 洪鳳漢 (肅宗三九-正祖二年) 의先輩인듯하니 鄭潤卿의戊申은英祖四年이라보는 것이妥當할 것이다. 따라서本書의編纂은英祖三, 四年임에틀님없다.
다음은海東歌謠의編纂年代이다. 이에對하여는筆者가本報第二號에 「編者가肅宗朝사람인것으로미루어보아 肅宗二十九年임을짐작할수있다」하였다. 이는筆者의單純한不注意로일어난적잔은錯誤다. 卽編者金壽長은本書卷末에古今歌者의姓諱를年齒順으로記載하였다는古今唱歌諸氏中에 金天澤의後輩로되여있다. 萬若이에틀님이없다면 本書가編者의七十四歲의晩年編纂이니 의례히 靑丘永言보다後代에編纂되였을것이고또卷頭作家諸氏에金裕器, 金聖基等은肅廟朝人이라하고 李在, 尹游, 李鼎輔等에對하여는今朝人이라하엿스니「今朝」는勿論分明치못하나 肅宗以後景宗朝或은英祖朝일것은疑心없다. 이러한點으로보아本書의編纂年代를말하는癸未는 肅宗二十九年의癸未가아니고 그後代의癸未卽英祖三十九年의癸未일것을알겟다. 그러므로本書의編纂年代는英祖三十九年으로訂正하야둔다.
그러면靑丘永言編纂은編者의年齒와엇더한關係를가지고있을가를다시生覺하야보자. 編者의傳記가只今分明치못한以上 亦是그의正確함을얻지못할것은미리豫測되는바이나 金天澤은金壽長의先輩라하엿스며 海東歌謠의卷末張福紹의序文에 「金君壽長與南波金天澤相對敬亭山兩翁即當世洞歌者也라」 한것을보면 그다지많은年齒에差異는없는듯하다. 또靑丘永言은海東歌謠보다約三十五年前에編纂되엿다. 海東歌謠는金壽長의七十四歲時에編纂되엿스니 靑丘永言編纂當時의金天澤年齡도大綱은짐작될듯하다. 假令只今金天澤을金壽長보다 五六年의先輩라본다면 靑丘永言은그의四十五歲頃에編纂되엿슬것을假想할수있다. 勿論이것은 한假想에지나지못하나 그러나그內容을본다면 編者自身은勿論 金壽長의作까지一首를發見치못한 것은 또한그들의少壯時 말하자면아직作家로서充分한力量을發揮치못하던때의編纂일것을짐작할수있을듯하다.
要컨대 靑丘永言은編者의少壯時英祖三, 四年頃의編纂이고 海東歌謠는編者의晩年英祖三十九年頃의編纂일것을보앗스나 兩大歌謠集이相距가머잔이 더욱이같은英祖時代에出現하엿다는것은 朝鮮詩歌史上의重大한劃時期的事實일것을 이저서서는안될것이다. 本編이多少라도이方面의消息을傳할수있다면 筆者의本懷이라하겟다. 前日의妄論을謝하는同時에 이것으로그補筆에代하고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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