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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대표 극단 종합판 청춘좌―청춘좌 소사―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조선 대표 극단 종합판 청춘좌―청춘좌 소사― 朝鮮代表劇團綜合版 靑春座―靑春座小史―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변기종 卞基鍾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3 昭和十六年三月
면    수 190 (190)
기사
[사진] 卞基鍾으로 추정
★靑春座小史……卞基鐘
★「林巨正」其他……韓一松
★舞臺回想……朴玉草
★旅行記……卜元圭
★南北移舍記……姜魯石

靑春座小史
靑春座代表 卞基鍾
먼저 우리劇團의 小史를 쓰기前에 朝鮮演劇의 由來를 몇마디 쓰고저한다.
只今으로부터 三十年前 大正元年에 비로소 內地로부터 新派劇을 模倣해다가 朝鮮新派演劇이라고 名稱을 붙여서 上演을 하게된것이 朝鮮의 처음으로 演劇運動의 始作이였다.
于先 첫出發로 京城에 圓覺社, 演興社, 開城에 開城座에는 朝鮮에서 처음으로 演劇을하는 淨淨한 木頭(キがシラ)(木頭는 現在各劇團에서 使用하는 銅鑼와같은것)소래에 맞추어 幕은 열렸다.
그때 圓覺社에는 尹白南先生이 指導하시는 劇團文秀星이 있었고 演興社에는 故林聖九氏의 指導하는 劇團革新團이 있었고 開城座에는 李基世氏가 指導하시는 劇團唯一團이 있었다.
이三個團體의 公演을 비롯하여 演劇團體는 繼續的으로 組織되여 京城市內 各劇場中 長安社에는 劇團以和團 光武臺에는 劇團鷄林美團. 團成社에는 劇團革新鮮美團이 各各 公演을 하게되었다. 이같이 各劇場에는 演劇團體가 競爭的으로 公演을 하게되었다.
처음에는 新派演劇求景가자하고 밀려드는 觀衆이 各劇場에 立錐의餘地가 없더니 그웬일인지 한번씩 와보고는 아모런 所感 또는 娛樂的興味라도 맛보지못한 까닭인지 不過 몇달 가지못해서 觀客은 발길이 끈어지기 始作하였다.
그때의 情况을 回顧해보면 勿論 演劇의 價値라든가 觀衆을 껄만한 魅力이 없었든것마는 事實이나 本來演劇이란 무엇인지를 모르는 大衆을 劇場안으로 껄어드릴 아무런 策動이 없었다.
이리하여 各劇團은 組織當初부터 經營難에 빠지게되니 不得已 地方公演을 떠나가게되었다. 이러고보니 各劇場三團體가 地方公演을 떠나가는 順序에따라 門을 닷게되었다.
그리자 內地人興行業者들은 各劇場을 買收해서 活動寫眞常設舘을 만들고 말었다.
그때에 圓覺社는 只今 西大門町救世軍本營附近住宅地로 變하고 演興社는 只今 仁寺町朝鮮劇場跡이고 長安社는 只今 敦義町悅賓料理店으로化하고 團成社는 只今 授恩町大陸劇場이고 光武臺는 只今 黃金町賓塚劇場이다.
그때 地方公演을 떠나간 各團體는 勿論 收支가 맛지아니했다. 그래서 解散을 하고 團體名稱을 바꾸워가지고 다시 모이고하면서 말못할 苦城을 넘고 또넘어오며 몇몇 同志는 百折不屈하는 氣勢로 演劇行動을 繼續해왔다.
이러기를 二十星霜을 지나오니 文化의 發展됨을따라 觀衆도 演劇을 理解하게되고 또한 演劇人自身도 各自의 技能을 發揮할 過程에 일으렀으나 演劇을 할劇場이 없어서 演劇人들 가슴속에는 怨恨이 사못처있었다.
이리하자 昭和十一年에 일으러 우리의恩人 故 洪淳彥氏가 우리演劇人들이 劇場이 없어 恨이되는것을 알었다는듯이 그의 피와 땀으로 쌓고 裝飾해논것이 不滿하나마 바로 現在 東洋劇場이다.
그는 어렵고 없는가운데서 演劇의 殿堂 東洋劇場을 建設해놓고 演劇人을 召集하게되었다. 먼저 朴齊行, 黃澈, 徐月影, 沈影, 金東圭, 卜元圭, 故車紅女, 金仙草, 金鮮英, 그外 몇몇사람으로 靑春座를 組織하였다.
昭和十一年十二月十四日 午後七時에 雄壯한 銅鑼소리가 나자 우리 靑春座의 첫公演의 幕은 올라갔다. 期待하였든 觀衆들은 야!하는소리가 彼此에 約束이라도 한것처럼 一齊히 소리처나왔다. 그는 情熱을 다해서 設備해논 舞臺裝置를보고 其時 經營主故洪淳彥氏에게 對하야 感嘆하는 첫人事의 야-소리였다.
그때 出演하는 우리들도 朝鮮에서는 처음으로 使用되는 蒼空裝置! 理想的인 建物裝置! 適合한衣裳! 이여러가지에 綜合되여 前日에 自身들이 求해내지못한 表情動作이며 모든 雰圍氣가 한층 새로워진것같해서 그만 기분에 陶醉해버리고 말었다.
그때 기쁨을 回想하고 故洪淳彥氏를 追憶하게되니 筆者의 붓대는 不知中 暫間동안 멈처지고 만다.
世上은 好事多魔라드니 經營主 洪氏는 開舘한지 一年後에 넘우도 事業에 情熱을 받친탓이든지 遇然이 病이 나자 藥石의 効가없이 自己손으로 곡괭이를 들고 삽을 잡어가며 세워논 東劇을 남겨놓고! 永遠이 演劇事業을 같이하자든 同志들의 손길을 떨치고! 그만 감기 실흔 눈을 감으며 不歸의客이 되고 말었다. 그리고보니 主人을 잃은 우리 靑春座員은 寞然하였다. 事業上으로 理解있는 主人을 잃은것이 안타까웠고 人間的으로 그의 一生이 넘우도 짤벗든것이 몹시 哀惜했다. 그러나 우리는 冷情한 態度로 世上을 떠난 그를 잊어버리는 道理밖에 아무런 道理가 없었다. 其後 靑春座는 洪氏生存時에 支配人役으로 統轄하시든 崔象德先生이 東劇을 引繼해서 經營하시게되었다.
그리해서 우리 靑春座는 崔先生을 새主人으로 맞이하게되매 先生의 理解넓으신 擁護와 溫厚하신 慰勞에 우리의 誠意는 再出發을 아니할수가없었다.
그렇지만 崔先生이 經營하는동안 그때는 누구나 不景氣를 외치든때라 勿論 收入上으로보아 收支가 平等하리라고는 生覺을 아니했으나 本是가 貧因에 빠저있는 우리演劇人들이라 끈임없이 드나드는것이 崔先生의房이니 모두가 困難한 事情뿐이였을것이다.
그러니 人情있는 崔先生께서는 經營主라는 威身으로나 또는 各自의事情에 끌려 十中八九는 各自要求에 應해주었을것이다. 그러나 收支計算에 盲目인 우리는 그다지 經營難에 빠저있는것은 모르고있다가 崔先生이 經營하신지 三年되는 昭和十四年八月에 비로소 崔先生이 經營中止한다는 宣言을 듣고서야 알었다. 그때 우리는 놀라운가슴을 움켜잡고 어찌해서 진작 우리에게 經營難에 關한 妥協이 없었든가하고 崔先生을 怨望도 해보았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에게 弱點을 아니보히려고 苦心하신데는 우리 亦是 그만 同情이 끌리고 말었다.
또 主人을 잃어버린 우리 靑春座는 어찌할고하는 問題에 있어서 여러가지로 討議한結果 靑春座가 經營主를 떠나 獨營을 하자는 問題에 일으렀었으나 그亦是 一致가 되지못한 關係上 各自가 個人行動을 取하기로 決議가 되었다.
그리하야 오랫동안 苦樂을 같이하든 同志間에 눈물겨운 作別을 告하고 韓一松外 몇몇 同志는 情깊은 東劇에 남어있어가지고 우리 靑春座는 세번째 새主人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는 現東劇經營主 젊은 實業家 金泰潤氏다.
새主人을 맞이한 우리는 人情問題를 떠나서 演劇行動에 充實하자는 目標밑에서 座員을 補充해가지고 昭和十四年九月十六日에 東洋劇場 革新公演이란 看板아래서 우리 靑春座는 다시 公演을 始作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今番 맞이한 새主人이 演劇界에 全혀 生素하신 분임으로 우리演劇行動에 있어서나 事業上에 많은 支障이나 있지 아니할가 하고 우리는 焦燥한 마음으로 念慮를 하였으나 벌써 一週年이 지나가고 二週年을 맞이하는동안 오늘에 일으기까지 아모런 支障이없이 順調로 業務를 進行시키는것을 보면 우리는 새主人 金氏의 手腕과 德望에 敬意를 表하며 앞으로 指導하심에 順應할것을 覺悟한다.

現在靑春座員
韓一松 金勝鎬 姜魯石
金鐵 卜元圭 金允浩
南相億 崔大奎 許影
陳娘 朴玉草 姜寶金
李珖淑 李世燕 李吉宰
權瑞秋 金玉子 趙美鈴
卞基鍾 以上
끝으로 讀者諸賢과 靑春座愛劇家諸賢께 드릴말슴은 우리 靑春座의 陣容을 强化시키고 新體制下의 國民된 義務로서 忠實한 演劇行動을 하고저하는 우리 靑春座의 企劃을 期待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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