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문헌
검색 > 문헌 > 기사
근대 가요 대방가―신오위장―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근대 가요 대방가―신오위장― 近代歌謠大方家―申五衛―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조운 曹雲
출처정보 신생 新生
연    도 1929-01 昭和四年一月
면    수 30 (30)
기사
육자백이 愁心歌 아리랑타령이나 沈淸歌는 洋服 입은 紳士나 갓쓴 兩班이나 둥지게 잠방이에 테머리한 일꾼이나 어른이니 아이니 안악네할것 없이 몯우가 어 좋아하고 들어 좋아합니다. 近來 새 놀애와 새 曲調가 많이 流行하게 되었으나 그는 學生이나 또는 그에 소양이 있는 極 小數의 人이 질길 뿐이요 同胞의 많이는 아직도 依然히 예로붙 어나려오는 놀애를 좋아합니다.
워낙 民謠란 民衆 그 自己네의 思想感情을 빩아숭이로 表白한 그들의 共通的 作品인지라 作者 한둘의 名聲이나 혹은 傳播를 强制하는 어떤 權力으로서 펴지는게 아니요 民衆의 마음에 들어 저절로 傳播되며 時代와 民族을 딿아 자꾸 變하며 또한 그 時代와 그 民族에게 고이나니 이렇듯 民謠는 民族과 平行線으로 發達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民衆을 질겁게 하는 것으로나 感化를 주는 것으로나 그 民衆에게 및이는 힘이 무엇보다도 끔찍하며 더욱 民謠에 表現된 리즘과 思想은 그 主人의 特色을 들어낸 것이라 그 民族性의 硏究資料로서도 무엇보다 要緊한 것일 것이니 愛蘭이나 新興國 첵코슬로박의 例를 보아 의심할바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어느 나라를 勿論하고 文學도 또한 그 나라의 傳說 및 民謠에서 出發하여 發達하였나니 우리의 詩歌도 또한 이 民謠에 基礎하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意味에서 보아 그동안 全然히 等閒에 붙이고 모르는 척하든 民謠나 時調에 着眼하시는 분이 바야흐로 많아짐을 깃버하며 먹을 다시 갈아 表題에 내센대로 近代歌謠의 大方家 申五衛將을 紹介하겠읍니다.
이는 世上에 널리 알리어진 이가 아니라 그를 아는 이가 흖지 않으나 광대로는 高敞 申五衛將을 모르는 이가 없나니 그를 모르고 광대되지 못하며 광대로는 그이를 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낫든 못낫든 우리 民衆의 품에 안기어 龍愛를 받았고 상긔도 우리를 웃기고 울리고 하는 우리 藝術的 所有로 오직 이것뿐인 광대의 소리 여섯 마당이 다 申五衛將의 손을 거치어 오늘날의 것에 이르렀고 流行되는 俗謠의 重要한 것은 거이가 그이의 創作이며 有名한 광대의 대개는 先生의 指導와 批評을 받은 것이라 합니다. 近代에 있어서 이렇듯 偉大한 功績을 우리 歌謠에 쌓은 大家 申五衛將은 과연 어떠한 이인가.
네 선생이 뉘라시냐 성관은 平山申氏
이슬ㅅ在 효도孝는 장적의 함ㅅ자시오
일백百 근원源은 친구간에 字號로다
뜰앞에 벽오동은 壬申生의 동갑이라
시호는 桐里시니 너도공부 하략이면
가끔가끔 찾아오라
壬申生이라니 百七十年前입니다. 先生은 高敞 胎生이나 그의 父親은 서울사람으로 十七에 落鄕하였는데 成婚만 하고 新行도미차아니한 新婦가 딸아 쫓차 나려 왔었드라는 것을보면 그 집안의 식그러웠음을 짐작하겠으며 先生의 幼時가 그리넉넉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읍니다.
의식지게 하노라고 불피풍우 四十年에
검은털이 희었으니
한 놀애를 들으면 젊어서는 살림이 무던히 고생한 것을 알수 있으며 그 遺趾를 살필 때 末年에는 벼千이나했드라는 것을 믿을수 있읍니다.
四十까지는 오로지 살림에만 애를 쓰다가 그게 좀 넉넉해 집을 딸아 生을 無爲에 붙이고 말아질 先生이 아닌지라 남저지 三十餘年은 歌謠의 硏究·創作·批評으로 마치었읍니다.
사나희로 朝鮮생겨 將相宅에 못생기고
활잘쏘아 평통할가 글잘한다 과거할가
북바치는 하소연과 용소슴 치는 마음의 물결을 놀애에 붙이어 펼친 것입니다.
先生의 博學은 놀라지 않을수 없으며 더욱 音律에 精通하고 詩文에 能하였읍니다. 허나 先生의 先生은 누구인지 아는 이가 없읍니다. 어려서는 그의 慈親에게 親히 배우었다 하며 四十後 歌謠를 專門으로 硏鑚하면서는 거긔서 한 四五十里山으로아가 숨은 大學者가 있어 그의 門을 자주두렸다하나 그가 누구인줄 또한 알길 없읍니다. 先生은 深思의 人이며 冥想의 人이었읍니다. 사람을 對하여 談話할 때에는 늘 눈을 감고 앉았다 하며 平生에 밤에 불을 켜두는 일이 없었고 방에는 돗자리를 깔고 벽은 검은 조히로 도배를 했드라 합니다.
先生은 學識과 文章보다도 人格이 高貴하였다 하며 當時 그 住民의 最高의 崇敬을 받았다 하며 마즈막 御使로 魚允中이 湖南에 暗行할때『南으로 와 先生을 보았읍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逸語가 많지마는 그中 어느 凶年에 飢民을 주게 되는데『代償이 없이 恩惠를 베플면 주는 나는 부즈럽시 善한 사람인체할까 두렵고 받는 저희는 恩惠를 입는 사람으로 부끄러워할 것이니 그게 오이려 옳지 않은 일이다』하여『쓸모 없는 물건이라도 가지고 오라 벼와 바꾸어 주마』하였읍니다. 가지어 오는 것은 펴보지 않고『걸레 한줌에 벼 한섬』격으로 풀어내 주어 그의 後孫의 집에는 年前까지 걸레와 짚북덕이가 로적가리 같이 있었다 합니다. 이 한 이약이로도 先生이 어떠한 어른이었든 것을 살피기에 넉넉합니다.
先生은 또열네간 줄행낭의 그 많은 奴僕에게『해라』를 각박히 한 적이 없었으니 그의 겸손함과 同情이 깊은 줄을알겠고 그의 門下에게도 늘 이러한 警戒가 많았다 합니다.
못할레라 못할래라 오입쟁이 게집 노릇 世上天地 못할레라 한푼 반푼 못 벌면서 꾸어다 해준 밥 얼른하면 상물 치고 속옷 뜯어 해준 보션 술주정에 술항 봅고 밥사이로 또 하라고 아등 아등 졸러낸다.
하는 놀애를 보면 自然 그 門下에 배우는 사람 中에는 할량이나 오입장이가 많을 것은 事實이라 딸아서 그러한 黃陶에 더욱 힘을 썼읍니다. 놀애와 소리의 大家라 하니 얼핏 생각하고 先生도 할량이나 오입장이의 발천으로 너길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決코 그렇지 않으니 先生은 그에서 그 偉大함을 볼수 있는 걷입내다. 先生의 門下를 지내간 妓生만 하여도 八十餘名이라 하나 先生은 七十平生에 作妾은 커녕 妓生의 오입은 고만두고 손목한번 잡고 웃음엣 소리를 한적도 도모지 없다 합니다.
先生의 生活은 質素와 儉朴 그것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風致가 있고 淸趣가 있었든것입니다.
고창읍내 虹門안에
두충나무 무지개문
시내우에 마루놓고
방죽우에 포도싫어
첨아끝에 련꽃핀다
이 놀애를 보면 先生의 居處가 어떠하였음을 알 것이니 趣味란 人格과 相伴하는 것이라 그 또한 高雅할 것을 말할것도 없읍니다
當時의 碩儒 奇로사 先生은 先生의 年長이었으나 서로 追逐하였으니 그 반연은 이러합니다. 先生의 門下에 金春鶴이란 광대가 있어 로사의 壽宴에 톡기타령을 하였더니 로사 듯고 前에 듯든 것과 다른지라 再三 朗讀을 시킨 後에 그의 先生을 물었든 것입다. 高敞 申語里라는 말을 듯고 무릅을 치며『文章이다 文章이다』激讃하고 作品의 全部를 가지어다 읽고 이로붙어 서로 來徃하며 詩文을 論하였다 합니다.
先生의 功績을 紹介하기 前에 마지막으로 엃도닿도않은 申五衛將 이란 이름이 어이 된 것을 말슴하겠습니다. 先生은 五衛將 加資를 받은 것입니다. 돌아다니는 말에는 先生이景福宮 落成式宴에 彩仙이라는 女광대에게 成造歌라는 創作 놀애를 가르치어불리고 大院君의 고임을 받아 나려얻은 加資라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고 丙子饑饉에 탄 活人堂上이라 합니다.
광대나 곁에사람들이 위한답시고 오위장 오위장한 것만 傳播되어 이름이나 字號를 아는 이는 적고 거저 高敞申五衛將이라고만 하면 그러한 通으로는 다들 앎으로 그때문에 表題에도 字나 號를 쓰지 않고 申五衛將이라고 합니다. 五衛將이訛傳되여 申호장으로아는이도 있읍니다. (續)
이메일주소 무단 수집거부 권리침해신고 문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