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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극운동의 회고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우리 신극운동의 회고 우리新劇運動의回顧
종    류 논설 論說
필    자 서항석 徐恒錫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3 昭和十六年三月
면    수 169 (169)
기사
[사진]서항석의 사진으로 추정

政治, 經濟, 文化, 敎育等 모든 部門이 새로운 體制아래에 改編動員되는 이때 演劇文化方面에 있어서도 이에 順應하는 여러가지 움지김이 看取된다. 그리하여 今後의 演劇의 形態와 進路가 새로이 論議되고있다.
그런데 現下의 朝鮮演劇界를 살펴보건대 朝鮮演劇協會의 構成團體란것이 다 所謂興行劇團들이고 新劇團體는 一二年來로 沈滯散漫을 極한 탓으론지 하나도 連名되어있지 아니하니 現狀대로는 今後의 朝鮮演劇이 跛行的이 되지않을까 念慮되는배있다. 勿論 現存劇團들이 다 興行劇團인채로 從來보다는 훨신 淨化되고 健全하여질것은 期待되는바이나 그래도 舊殼이란 完全히 脫却되기 어려운것인바에는 從來의 興行劇的要素가 多分히 繼承되어지리라는것은 杞憂만에 그치지 않을것이다. 나의 보는바로는 今後 劇界의 課題가 國民演劇의 樹立에 있을진대 이에는 돌이어 더많은 要素를 過去의 新劇에서 繼承하여야할줄 안다.
그러므로 우리新劇運動을 回顧함은 現下의 情勢로 보아 必要한 일에 屬한다.

朝鮮演劇史上에 있어서 新劇的要素의 萠芽는 이미 李基世 尹白南兩氏의 演劇活動과 初期의 土月會에서도 찾어볼수 있으나 新劇이란 말이 明確한 意味內容을 가지고 實績이 또한 이에 伴한 것은 劇藝術硏究會의 出現으로부터이다. 그러므로 朝鮮의 新劇運動을 回顧함에는 劇硏을 筆頭로 하여야한다. 그러고 또 劇硏을 主로 하여야한다. 이것은 웨냐하면 新劇運動期의 前半에는 오직 劇硏이 있었을뿐이오 後半에 이르러 二三團體가 並進하였으나 역시 劇硏이 리-드하였으니 우리 新劇의 歷史는 大部分 劇硏苦鬪의 記錄이라하여도 過言이 아니기 때문이다.
劇藝術硏究會는 昭和六年七月八日에 金普燮 柳致眞 李軒求 尹白南 異河潤 張起悌 鄭寅燮 曹喜淳 崔珽宇 咸大勳 洪海星及筆者의 十二人이 同人制로 結成한 團體이다. 이들은 大部分 新銳의 演劇學徒로서 當時의 興行劇이 나날이 質的으로 低下하여감을 放任看過할수없다하여 劇壇에서 低級한 娛樂과 商業主義를 驅逐하고 거기에 最高級의 戱曲과 舞臺藝術을 建設하기 爲하여 한껏 眞摯하고 良心的인 態度로써 猛然히 蹶起한것이다. 그들은 新劇樹立이라는 旗幟를 높이 들고 潑刺하고 底力있는 活動을 開始하였다. 新劇이란 말은 보다 藝術的이오 營利를 떠나 眞實을 追究하는 精神이 熾烈한 演劇을 가르치는 말로서 이러한 演劇의 樹立을 爲한 그運動은 諸外國의 近代劇運動과 倣似한것이었다.
이러한 運動의 擡頭가 얼마나 必要하였던가는 當時의 劇界情况을 一瞥하면 容易히 首肯될 일인가 한다. 興行劇이란 오늘날 와서도 低然히 옛날의 範疇를 넘지못하여 부질없은 웃음과 强要된 눈물로써 劇場을 채우기를 꾀하지만 그當時에는 有心人의 嚬蹙을 받기에 넉넉할만콤 尤甚하였었다. 劇場이 思考를 刺戟하고 情緖를 涵養하는 곳이 되기와는 너무도 距離가 있었었다. 演劇이 商業主義의 奴隸가 되어 興行成績을 올리기 爲하여서는 안하는 짓이 없으면서도 오히려 難航을 繼續하지않으면 안되어 그低下가 底止할바를 모르는 판이었었다. 이러한 때이었는지라 劇硏의 蹶起와 그標榜은 劇界에 對하여 한개의 適應劑가 되기에 넉넉하였다. 그러나 劇界의 病들음이 甚하였었는지라 劇硏의 길은 荊棘의 길이 아닐수없었다.
劇硏은 朝鮮의 演劇을 ABC로부터 再建하려는 意圖下에 講演會를 열어서는 社會의 理解를 深化시키고 硏究生을 모아서는 技術의 鍊磨에 注力하는 同時에 自體의 敎養을 爲하여 劇藝術의 硏究를 더욱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昭和七年五月四日 朝鮮劇場에서「고-골리」作「檢察官」으로써 第一回公演을 가지어 朝鮮新劇史上에 빛나는 첫記錄을 내었다. 그後의 劇硏은 成功에 새로운 勇氣를 얻고 失敗에 새로운 經驗을 쌓어가면서 바른길을 꾸준히 걸어 昭和十四年四月까지에 總二十四回의 公演記錄(外에地方巡演 三次)을 남기고 情勢의 激變으로 그만 有耶無耶가 되고 말었다.

돌이켜 보건대 昭和十一年까지는 劇硏의 孤軍舊鬪期요 昭和十二年에 들어와서 浪漫座等 新團體가 더 생기어 東亞日報社主催의 第一回公演콩쿨에 四個團體의 參加를 보앉으니 이로부터 新劇의 多彩期이다.
從來는 新劇은 一部 誠者의 理解를 얻고 主로 學生들의 憧憬을 받으면서 차차 愛好觀客層을 넓혀오던것이 저 콩쿨을 前後하여서는 一躍 一般大衆에게까지 어느程度의 親近함을 받게되었다. 이것은 新劇人의 技術이 熟練된것도 原因이오 콩쿨도 크게 도움이 된것이었다.
이때쯤부터는 新劇은 단지 觀客層에만 淸新한 魅力을 가졌을뿐 아니라 劇壇人에게도 熾烈한 憧憬을 자아내었다. 저中央舞臺가 처음에는 中間劇을 標榜하다가 나종에는 新劇陣營에 參列한것, 興行劇團의 優秀한 演技者中에 新劇人으로 善變한 사람이 있는것等은 다 這間의 消息을 雄辯하는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隆運이 豫想되던 新劇도 昭和十四年의 第二回演劇콩쿨에 劇硏座 浪漫座 中央舞臺 藝友劇場等 四個團體의 參加를 보고는 그多彩期가 끝나고 말었다.
各團體의 沈滯 散漫 彷徨 不振의 狀態에서 겨우 收拾하여 第二回콩쿨을 치른 뒤에는 그만 흐지부지된것이다.
이에는 各團體의 內在的原因도 각각 있을것이지마는 一律로 外部的情勢의 激變이 큰 原因이었던가 한다.
劇藝術硏究會는 昭和十三年五月에 時機尙早라고는 생각하면서도 新劇의 專門化企業化를 부르짖지 않을수 없어 이를 標榜하고 劇硏座로 改稱하였으며 餘他團體들도 다 職業化의 길로 나섰다. 그리하여 專用劇場을 가지지못한 이들 劇壇은 서투른 地方巡廻를 자주 試驗하게 되었다. 이미 專門化職業化의 標榜으로 말미암아 有能한 同伴者의 多數後退를 보아 陳勢가 脆弱한데다가 地方巡廻로 因한 演劇의 質的低下, 團員의 疲勞, 劇團의 疲弊가 겻들었고 그우에 經營難은 갈스록 甚하니 어느團體이고 頹勢을 挽回할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昨昭和十五年에 들어와서는 新劇團體는 가끔 消息으로만 再起를 傳한것이 고작이고 단한번의 公演도 보여준 일이 없다.
最近에 結成된 朝鮮演劇協會에는 前記諸團體中에는 하나도 連名된것이 없다. 이제 新劇은 完全히 死滅하였는가. 아니 劇團高協이 新劇에의 努力을 하고있으니 그러면 新劇은 오히려 살어있는것인가.
劇硏 滿十年인 昭和十六年의 新劇界가 이렇게 蕭條할줄이야……
[사진]宋影作「秋風」

現在에 있어서 新劇이 設使 絶滅되어 있다 할지라도 過去十年新劇運動이 朝鮮演劇의 向上發展에 寄興한 功績을 抹殺할수 없으리라. 試하여 十年前의 興行劇과 今日의 興行劇과를 比較하여본다면 그것이 그自體의 自然成長的發展으로 到達하였을 程度보다 훨신 前進하여있고 淨化되어있는것은 新劇運動의 刺戟에 힘닙음이 많음을 누구나 앙탈하지못할것이다. 그 戱曲水準에 있어서, 그 舞臺美術에 있어서 實例를 얼마던지 들수있다.
다시 過去의 新劇運動은 今後의 演劇이 繼承하여야할 여러가지 長處를 가겼었다.
今後의 演劇이 어떤演劇일까, 이에 對하여서는 具體的인 論議가 必要할것이지만 大體로는 新體制에 適應한 健全한 國民演劇일것은 異議를 揷할 餘地가 없을까 한다.
그러타면 今後의 演劇은 過去의 新劇運動에서 그劇藝術에 對한 眞摯하고 良心的인 態度를 배워야 할것이오 營利를 떠나 眞實을 追究하는 精神을 繼承하여야 할것이다.
그보다 한걸음 더나아가서는 今後의 演劇의 指導的役割은 新劇人의 再起에 期待할것이니, 진실로 그들이 過去의 自由主義的인 態度를 完全히 淸算하고 國民演劇의 方向으로 動員된다면 國民演劇理論의 樹立과 그實踐에 顯著한 功課를 내일것이다.
現在의 朝鮮演劇協會의 構成分子를 볼때 저方面에 缺如함이 있슴을 느끼게 되므로 將來할 演劇의 發足과 發展을 爲하여 特히 이點을 示唆하여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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