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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과 국민극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신극과 국민극 新劇과國民劇
종    류 논설 論說
필    자 유치진 柳致眞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3 昭和十六年三月
면    수 166 (166)
기사
-新劇運動의今後進路-
柳致眞
[사진]유치진으로 추정
新劇이란 뭐냐? 新劇이 旺盛했느니, 新劇이 沈滯하느니, 新劇을 樹立해야하느니……하는소리를 우리는 흔이 해왔다. 그러면 大體 어떤게 新劇일까?
나는 이 묵은課題를 새삼스럽게 한번 들처보련다.
新劇이란 그 起源을 따저보면 商業劇에對한 反撥로써 일어난게다. 演劇이 營利의 道具로써 너무나 그文化性과 藝術性을 歪曲當했기때문에 그文化性과 藝術性을 지키고, 發展시켜야만하겠다. 少數人의 營利의 對象으로 좀먹어들어가는 演劇의 藝術性과 文化性을 擁護하자. 그렇지않으면 演劇은―드디어 商業劇조차도―滅亡하고만다.
이것이 新劇이 新劇의 旗幟을 내든 根本的인 動機라하겠다.
佛蘭西, 獨逸, 英國, 露西亞, 米國―어느나라 할것없이 新劇의 첫動機를 살펴보면 다 여기에 歸納된다. 實로 演劇의 藝術性과文化性을 지키려는 이理念은 世界的으로 統一된 新劇의 出發的인 理念이있던것이다.
그리하여 新劇의 世界에서「안토와-누」도 나고,「라인하르트」도나고,「골든·클레이그」도 나고,「메이엘호리드」도 나고,「유진·오닐」도 났다. 그外에도 新劇에對한數많은 理想家와 實踐家가 뒤를 이어 叢出했다. 그들은 모다 演劇의 文化性과 藝術性을 지키고 그것을 發展시키기위해서 一生을 바쳤고, 또 바치고있다.
그러나 以上의 新劇人은 演劇의 文化性이나 藝術性에 對해서 各々 各自의 見解를 갖었었다. 어떤사람은 文化性中에라도 政治性을 高調한사람도있고, 어떤사람은 敎育性에 置重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演劇의 藝術性에 있어서도「골든·크레그」의 見解와「안토와-누」의 見解는 다르고,「메이엘호리드」와「카메르느이」의 立場은 다르다. 이와같이 演劇人의 新劇에 對한立場은 달렀다. 即 그의 社會觀과 藝術觀의 相異는 新劇에對한 見解의 相異로써 나타난것이다. 같을新劇이라도 世界의 新劇界를 둘러보면 各人各色―정말 여러가지「쟌루」의 藝術形態가 있지않은가?
[사진]金玉均의舞臺
內地만 하더래도―內地은 아즉 新劇이 藝術的으로 深化되지못하여 完成된 뚜렸한 新劇의「쟌루」가 없지마는 그래도 新劇人 各自의 新劇에對한 理想이 다 갖지못하다. 各自의 政治觀과 藝術觀의 相異는 스스로 新劇에對한 見解를 달리하게된것이다. 쉽게말하면 東京의 文學座의 新劇에 對한 見解와 新協의 그것은 다르지 않었던가.
그러던것이 요즘 우리나라의 政治經濟文化가 新體制라는 새로운 政治體制아래에 革新됨에따라서 文化의 一翼인 演劇도 再吟味하지 않을수없게되었다.
現下情勢는 모든 社會生活이 從來와같이 自由競爭的으로 個人의 生活만을 爲主할수없다. 個人보다도 國家를 앞세우고, 國家를 위해서는 個人을 바치지않으면 안된다.
그러기때문에 우리는 從來와같은 新劇에對한 各人各色의 見解를 成立시키기前에 國家라는 크다란 命題앞에다가 우리의 藝術을 내놓지 않으면 안되게되었다.
即 앞으로서의 新劇의 指導精神은 群雄割據的인 從前과는 달러서 單只 하나다. 그것은 國家가 理念하는 政治的인 方面이 그것이다. 이方向으로 整備되여있는 新劇을 우리는 오늘날 國民劇이라 부른다. 여태까지 新劇으로써 불러지던演劇은 그役割이 끝났다. 인제는 새로운 時代를 이끄러갈 演劇은 國民劇으로 代置되지않을수 없게된것이다.
그러면 國民劇때문에 新劇은 滅亡하였는가? 新劇은 國民劇에 밀려서 永遠한 무덤속에 들어가고만것인가―나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는者는 아니다. 오히려 新劇의 根本的인精神을 살려주는者 혹은 그精神를 一步 實現의길로 이끄러주는者가 國民劇이라하겠다. 이글의 許頭에 애초에 新劇은 營利本位에 좀먹어가는 演劇에 反抗하여 일어난 演劇이라고 나는 하였다.
생각컨댄 國民劇運動은 무엇보다도 營利主義者에손에 붓들려있는 演劇을 빼아서서 그것을 國民에게 내주는 運動이다. 營利의 道具가 된 演劇을 公益優先으로 내세우자. 即 演劇으로하여금 國民의 共有物을 맨글어서 全國民으로하여금 한가지 理念속에서 다같이 幸福을 느끼고, 共通된 不幸에서 같이 울게하는것이 國民劇의 根本的인 理想이 아닐까한다.
營利萬能의 經濟機構에서 傀儡化되어가는 우리의 文化를 營利의 拘束에서 解放시켜서 文化本然의 姿態로 돌아가게 하자는것이 新體制下의 文化運動의 核心이기 때문이다.
本是 演劇은 民衆의것이다. 決코 一部商人의 商品이 아니였다.
自古로 朝鮮에 있던 가장 演劇의 오랜 形態인 山臺노리, 五광대 鳳山탈노리等의 假面劇을 보던지 希臘劇의 發生을 거슬러올라가 보아라. 그것은 決코 商品으로 始作된게 아니오, 全民衆의 享有物로써 始終된게 아니던가?
이點으로 보아서 新劇의 根本理想과 國民劇의 그것은 完全히 一致된다. 國民劇運動은 演劇本然의 態를 찾아낼려는 運動이오, 新劇이 根本的으로 理想하던바 理想의 一部를 다시금 深求하려는 運動이다.
事實 요즘이 新劇本來의 理想을 잃고 너무나 末稍的인 部分에 빠저서 헤어날줄을 몰랐었다. 그러던것을 國民劇은 新劇을 演劇의 本然의 理想에 돌아가게하려한다. 오늘날 國民劇 한테다가 그자리를 讓步해준 新劇은 決코 滅亡한게 아니다. 國民劇으로써 新劇은 一步 前進한다. 正히 新劇은 國民劇에서 再生하지 않으면 안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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