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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서 활약하는 우리 3화형―최승희·박외선·김민자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동경서 활약하는 우리 3화형―최승희·박외선·김민자 東京서活躍하는우리三花形―崔承喜·朴外仙·金敏子
종    류 대담 對談
필    자 최정순 崔貞順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3 昭和十六年三月
면    수 78 (78)
기사
東京에서 崔 貞 順

朝鮮나오는崔承喜女史
언니가 날더러 三千里史特派員이되어, 崔承喜, 朴外仙, 金敏子諸氏를 좀 만나달라고 航空으로 편지를했다. 모두 有名한 분들이다. 본래 사람 만나기를 무서워하는性癖도 있으려니와, 그런 有名한분들을 어떻게 만날까하는거에 겁이났다. 더구나, 위선 무엇도 묻고 무엇도 묻고하라고, 1, 2 ,3, 4,를 매겨가며 짜드라니 써있었다. 만나기만하래도 겁이 나는데, 무엇 무엇 물어보기까지하라니 더욱 가슴이 두군거리는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언니의 부탁이고보니, 하로를 延期할수없는 일이므로, 나는 爲先 歐米各國을 行脚하여 朝鮮을 널리알린 舞姬 崔承喜女史를 찾고저 그분이 投宿한다는 常國호텔로 電話를 걸었다. 그랬드니 벌서 거기서 떠났는데 住所는 몰은다한다. 하긴 崔承喜라면 우리 아파-트의 下女까지 다 알고있는터이라 어떻게던 그居處를 알어낼수 없을바는 아니겠지만, 西쪽인지 東쪽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찾을수는 없어서 끝내, 모던日本社々長 馬海松씨의 고마운 指示를 받게되었다.
[사진]최승희의 무용 사진
崔承喜女史의 住宅-即 舞踊硏究는 衫並區永福町, 나있는代田에서 電車로 네停留場만 지나면 갈수있는 가까운곧이다. 東京地理가 그처럼 서틀은것은 아닌데, 거져 놀라리로 떠난 거름이라던지, 내 사사로운 일로 나왔을때와는 아주 다르게 서먹 서먹해진다. 永福町에들어서며 어느 가개에 들어가 물어본즉, 참 有名하긴한모양으로, 가개의 第一적은 심부름꾼아이가 손까락 한개를 꼬추세워들고 나서며,「저-기 저 文化住宅들이 쭉-늘어선델 가십시요, 그리루 가면 第一 우뚝히 히고 돋뵈는집이 바로 崔承喜氏집입니다」한다. 나는 아이의손까락 끝가는데를 바라보며, 崔承喜氏는 히틀러보다 더有名한것이 아닌가했다. 정말, 아이의 말대로 崔女史의舞踊所는 第一 우뚝 하게 돋뵈는 집이었기때문에 나는 아주 쉽게 찾어냈다.
뜰에 花草는 別로 심지않었으나, 잔디가 쪽 깔려있는것이 퍽 따사로웁다. 뻴-을 누르니 나와 맞는이는朝鮮아즈머니다. 來意를 말한즉, 應接室에 案內한다. 새빨간 카페트와 椅子의 쿳-숀도 모다 빨갛다. 應接室壁四面엔 崔女史의 춤추는 포-즈의 서너姿態가 걸린外에 매우 값이 나가리라뵈는 花甁과 人形이 있고, 또흙으로 만든 사람대가리같은 잘망 잘망한것들이 놓였는데, 그것이 骨董品인지 아닌지 나는 알지못해 한참궁금해하는때, 紳士 한분이 들어오신다. 崔女史가 아닌데 나는 잠깐 失望을 느꼇다. 하지만, 그분은 바로 崔承喜女史의 夫君되시는 安漠氏란다. 崔女史가 지금 바쁨으로 代身 나왔다는것인데, 하긴 夫婦同身이라는 말이있다하니, 代身할수도 있을것이라, 짐작하고 나는 安定된 맘으로 崔女史에게 물을 이야기를 그분과 시작했다. 그분을 崔承喜女史라 알고-.
「歐米에서 도라오신후 뭘 하구 계십니까?」
「三月二十日부터 닷새동안을「歌舞妓座」에서 公演합니다. 그래서 지금 아주 猛練習하구 있는中이죠」
듣고보니 練習場이라 생각키는쪽에서 장구, 피리, 꽹과리소리가 요린히 들려온다.
「朝鮮엔 언제 나가십니까?」
「四月初旬께 나가서 朝鮮各道로 한달가량 公演할 豫定입니다」
「歐米各國을 巡廻하면서 女子들이 에쁘다고 생각된나라는 어디얘요?」
좀 묻기 거북하나, 承喜女史라 알고 말해버렸다.
「특별이 들어서 말할만한곧은 없지만, 어쨋던 東洋女性들보다 一般的으로 洗練된맛이 있습디다. 아메리카女性들은 에쁘긴 한데 살결이 너무히고 체격이 커서 압박을 느끼게되드군요. 佛蘭西女性들은 대체로 체격이 크지도않구, 섬세한맛이 있구, 비교적 살빛두너무 히멸것찮구, 스페인的이어서, 東洋사람으로선 好意를 갖게되드군요. 그리구 南米, 지리-라는곧 女性들이 퍽 곱던것갔습니다」
「보신中에서 젤 山川이 아름답던 나라는 어딥디까」
「南佛 칸누-, 니-쓰, 몬테칼토, 리벨라地方等이고, 南米에선 오-데쟈네로, 北米에선 후로리다, 안테스山脈等이 記憶에 새롭습니다. 이 여러곧들은 물과 山이 좋았습니다. 都市로서 아름다운곧은, 巴里, 멕씨코, 라데마라等이었습니다」
「第一 환영받으신곳은 어딥니까?」
「一般으루보면 米州에서보담 歐羅巴쪽에서 환영을 받은것갔습니다. 特別히 어디라구 지적할순 없지만……」
「환영받던 얘기 좀 많이 해주십시요. 어떤 방식으루 환영합디까?」
「西洋이나 東洋이나 人心이란 마찬가지여서 日本이나 別다를껀 없어요. 그렇지만 그들은 表現性이 强하구 또 어디까지 行動的이므로, 나타나는點은 퍽 熱狂的입디다. 호텔루 찾어온다, 꽃다발을 보내준다, 劇場앞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싸인을 請한다, 물밀들듯 가꾸야로 몰려 들어온다, 야단들이드군요. 어떤 사람은 아니 東洋사람두 저렇게 體格좋은 사람이 있느냐고키를 다 대보구 그러드라나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계속되었을때 아무래도 崔承喜女史를 만나야 할것같았다. 그렇지않으면 언니한테 꾸지람 드를같은생각이 들었다.
「저 장구치구 피리부는델, 좀 가볼수 없습니까?」
安漠氏는 내 要求를 쉽게 들어주셨다. 정말 鍊習場엔 남치마에 분홍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동인 崔女史가 한창 춤을 추는데, 朝鮮情操를 담은 춤이었다.
한편쪽엔―바루 正面이다.―가야금하는사람, 장고치는사람, 피리부는사람들이 신이 나서 치고, 불고, 承喜女史는 또 신이 나서 춤을 춘다. 홀-은 한二十間 넉넉할만한 마루房인데 한쪽 壁에는 커-다란 거울이 걸려있고, 正面엔 피아노와 쓰지않는 장고, 쪽도리等, 여러가지 小道具들이 부산스레 놓여있고, 또 한쪽 구석엔 웬 할머니가, 第二世崔承喜인듯한 八九才된 女兒를 무릎에 올리앉지고, 춤을 구경하고있었다. 아까 어느책상우공冊에, 二年二組安勝子라 썼던것이 바루 그아이의 것임을알었다. 애기를안은분은 崔女史의 시어머님이신모양이었다.
承喜女史는 춤을 추다가, 나와 잠깐 이야기했다. 나는 女史가 매우 분주한것을 보고 더 다른얘기 할勇氣를 내지못하고, 그곧을 나왔다.

[사진]박외선과 아들로 추정
希臘彫刻같은 朴外仙女史
女士는 한때 朝鮮의 舞姬로 많은期待를 갖이던분이다. 馬海松氏와 結婚하신뒤엔 도모지 消息이없어서 팬들이 몹시 궁금해한다는것인데, 女史의 私宅을 아는수가 없어서, 書店에 나가 모던日本을 뒤져 爲先 馬海松氏를 찾기로했다.
그때가 아츰 열한時가 넘었는데, 아직 社에 안나오섰음으로. 그곧서 新小川私宅佳所를 알어가지고 그리로갔으나, 朴女史는 닷새前에 解産하시여 病院에 入院했다는것이다. 나는 그래도 만나야 하겠기에, 朴女史 언니는 前에 서로 알고 지난다던것을 記憶하고, 病院에 電話를 걸어달라 下女에게 부탁했다. 그랬더니 下女는 매우 親切히 내부탁을 들어주었고, 또 저쪽에서도, 아주 쉽게 날더러 찾어주면 고맙겠다는것이다. 비가 부실 부실 나리는 날세었다. 나는 爲先 女史가 入院한 病院부터 차져 놓고, 시장끼가 돌므로, 伊勢丹에 들어가 點心을 먹은후 꽃을 사가지고 그리로 갔다. 조고마한 깨끝한 病院 二層, 한 病室에서 애기의 울음소리가 울암차게 들려오는데, 그 房이 바루 내가 찾는 朴女史의 入院室이었다. 室內에 들어선즉, 看護婦, 쯔끼소에닌 할것없이 기다리고있은듯 반가워하고, 朴女史는 寢臺에 누운채, 또한 반갑게 마져줬다. 애기난지닷새라면 잘 모르긴하지만 대개 부석 부석한 얼굴일텐데, 女史는 도모지 애기난 얼굴같지않고 希臘彫刻같이 코와 턱과, 또 그外의 全體의 印象이 거져 뾰족하다. 그러나 매우 에뿐얼굴이요, 뾰족하게 날카로운 마련을해선 매우 부드럽고 유순하다. 머리는 약간 지지고 化粧은 엷게 했다. 언니와 아는터라 하지만, 서로얼굴을 對해 안 터가 아이므로, 언니한태서도 女史의 얼굴이 에쁘다던지, 印象이 유순하다던지 하는 이야긴 듣지못했는데-―나는 한참 황홀했다.
뻬-드 한옆에 世上에 나온지 닷새채되다느 빨간 皮膚의 애기가 뉘여있고, 朝鮮옷으로 아래위를 입은 세살난 종기타는 애가 뉘인애기옆에 서서「오도-도」「오도-도」하며 디레다본다. 女士의 長男이다. 종기는 조선말은 좀 서틀었다. 둘째 애기의 이름은 인제 조선계신 시부모님이 지어보낸다한다. 갓난애긴 아직 모르겠으나, 종기는 내가 본 여러애기들중에 귀여웠다. 女史는 아이의 하는양에 입이 버러져있었다.
「결혼한지 얼마나 되시지요?」
「만 사년됩니다」
그래도 女史는 아직 處女와가치 에쁘다. 누가 보던지 두 아들의 어머니라고는 하지 않으리라. 女史의 말슴에 依하며 몸이 본래 건강도 하려니와, 또 舞踊하던관계로 몸에 彈力이있어서 첫애기때도 그렇고 이번둘째번 애기도 무척 쉽게 나었다고 하는데 그처럼 處女같이 에쁜까닭도 여기에 있지않을까.
「朝鮮떠난지 오래되십니까?」
「十年됩니다. 그동안 두번밖에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氏의 視線은 故鄕을 回想하는듯 잠깐 天井을 응시하고있다.
「故鄕은 어디신가요?」
「馬山입니다. 열일곱살에 女高를 마치고 東京와서 高田せい子門下生이되어, 七年을 舞踊을 배웠는데, 朝鮮태생은 體格도 좋려니와, 藝術的天分도 상당히 많은모양이드구요. 자랑은 아니지만, 그때, 저와같이 硏究하던 사람들중에 젤 잘한다구 先生이 칭찬해주드군요」
「인제 舞踊을 안하시겠습니까?」
애기들의 어머님으로 만족해하시는것도 즐거울일이지만 누워있는 女史의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의 그늠늠하고 餘裕있어뵈고 부드럽고 나근나근한 體軀로부터 슴며 나오는 藝術的리즘이랄까, 어쨋던 이러한 무엇이 나로하여금 女史는 다시 舞臺에 나와줬으면하는 懇望을 갖이게했다.
「몸을 빼쳐낼수가 있어야지요, 집안일만 해두 잠시두 쉴새업는데요. 살림이란게 그렇게 손걸리는일인줄 몰랐어요. 映畵구경같은것두 잘 못가는걸요. 인제 아이가둘이 생겨서 더할거얘요. 거져 女잔 뭘하려면 애초부터 결혼 말어야지요. 남편을 섬기구 애 기르는것두 큰일인데, 그이상 다른일에 손을 뻗일수 있어야죠」
이렇게 말하는 女史는 結婚한것을 후회하는빛은 조금도 없었다. 거져 진정, 한사람의 안해와 아이들의어머니로서 만足해하고 幸福해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맑고 따사로운 房속의 希臘彫刻같은 에뿐 그분의 幸福이 여즈러짐이 없으리라 믿는다.

三年後에結婚한다는 金敏子孃
[사진] 김민자 추정
金敏子孃이 世界的舞姬 崔承喜女史의 首弟子라는것은 누구나 다 안다. 崔承喜女史가 有名한 탓도 있겠지만 敏子孃도 상당한 實力과 才質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昨年十二月十七日에 京城 府民舘에서 孃의 舞踊發表會까지 있어서 朝鮮있는 팬에게까지 그 이름이 널리 펴젔다. 하나 孃은 아직 獨으로 舞踊硏究所를 갖이않고崔承喜女史밑에 있다. 나는 崔女史를 만난 뒤에 孃을 만나 잠깐 이야기한일이 있는데 얼른 떠오르는 印象은 조고마했다. 눈이 반짝 반짝하는게, 몹시 총명하고 言語動作이 모다 재미있었다. 스승을 본받어섰음인지 남치마에 분홍저고리를 입었다.
「朝鮮서 언제 도라오셨습니까?」
「어제(一月十一日) 왔습니다」
「朝鮮公演의 印象을 좀 말슴해주세요」
「막연하게 뭐라 말슴할순 없지만, 故鄕이니만치, 퍽 따뜻한 感을 가질수있었어요. 제 舞踊을 보시고 친절히評을 해주는분이 많어서, 여간 기쁘지 않었습니다. 아직 完成은 되지 않었지만, 앞으로 成長할 素質이 있으니 더욱 힘쓰라구 말슴하시는분두 계셨습니다. 전 그분들의 말슴대로 앞으루 더욱 힘쓰겠습니다」
「가장 존경하는분은 누구십니까?」
「崔承喜先生님입니다. 이때까지 선생의 힘을 많이 입어왔습니다. 남의 덕만 입는것이 罪悚하구해서 인제부턴 저 혼자 硏究할까 하는 생각두 가지구 있습니다」
「그럼 곧 舞踊硏究所를 내시겠군요?」
「곳이래야 아직 언제겠습니까, 한 三年 더 硏究해야되겠죠」
「硏究所는 어디 내시겠습니까?」
「확실한 플랜은 없지만 대개 東京이 될것입니다」
「結婚은 안하시겠습니까?」
「안하기야 하겠습니까. 누구나 다 한번씩은 걸어야하는 길이니 저라구 그길을 避할수 있겠습니까 마는 그問題는 아직 二三年 더 지나 생각하려고합니다. 지금은 공부할 생각밖엔 없습니다」
「結婚 相對者는 어떤분으로 하시겠습니까?」
「첫재루 제 舞踊藝術을 理解해주는사람이래야 할것입니다. 전 結婚하드래두 舞臺를 떠나지않을테니까요. 돈이나 地位는 絶對로 바라지 않습니다」
孃의 理想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면서 나는 孃과 헤여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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