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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생활 10년기―명랑하고 정열적인 것―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배우 생활 10년기―명랑하고 정열적인 것― 俳優生活十年記―明朗하고情熱的인것―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김소영 金素英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1 昭和十六年一月
면    수 226 (226)
기사
[사진] 김소영
「방아타령」에서「半島의봄」에까지
金 素 英

이 表題에 對하여 쓰라시는 付託은 받었사오나 나의 俳優生活을 回顧하여 보건댄, 너무나 큰 問題이기 때문에, 무엇을 敢히 써야하겠는지 도모지 갈피를 차릴수가 없음니다.
햇수로 세여보면 十年에 채 몃달이 차지못하는 긴 時日이였습니다만은 이렇다 누구에게 자랑할만한 아무것도 보여주지못한 나로써 무엇을 記錄한다는것은 스사로 붓그러울뿐임니다. 따라 理念과 「쎈쓰」, 그리고 創作 이等 아무것도 갖지못한 自己를生覺할 때, 年代記錄에나 끗칠까 함니다 내가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남의 勸告에 못익이여 出演한 作品이 『방아타령』이였습니다. 때는 昭和六年 가을이요, 監督은 只今 朝鮮樂劇團에 게신 金尙鎭氏이였으며, 製作은 「新興푸로덕슌」이였습니다. 藝術이란 무엇인지 아니 그보다 映畵란 무엇인지도 全혀 모르는 어린이로써, 남의 勸告라할지라도 承諾한것을 只今 生覺하면 全身에서 「진땀」이 나는것을 이제 다시 깨닷습니다. 옛말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것이 아마, 이런 事實을 두고 한 말같이 生覺이 됨니다. 役의 範圍로 말슴하드래두 어린處女로 始作되여 늙은 사람이 되는때까지였으니 只今일지래두 不可能할것을 엇지나하였는지 오직 監督하신 분에게 未安한 生覺이 복바처 오를뿐입니다. 그러하오나 내自身이 이로 因緣하여 藝術慾을 갖게되였고 俳優로써 나아가겠다는 살길을 發見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收穫은 없었다고 역이고 있습니다. 오늘까지에 멫번이나 斷念할랴고 努力하여도 보았습니다만은, 좀더 좀더하며 이길에 발을 끈치못한것도 그때에 얻은 膳物로 生覺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 會社에서 藝術을 理解하지 못하던 때이라 家庭에서 反對하고 社會에서 「신통」히 역이지안는 俳優生活을 斷念하려고 家庭의 사람이 되어 數年은 집에 드러앉어 있었습니다만은 機會만 있으면 또 出馬하려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맛참 機會가 도라와 劇團新建設의 俳優로써 再活動할 機會를 갖게되였으니 兪鎭午氏作「박첨지」에 「立粉이」役을 맛허 첫舞臺를 밟게되였습니다. 이것이 俳優生活로써는 두번째이나 舞臺로서는 처음이였었습니다. 그때 生覺은 前과 달나 自發的임으로 무엇이던지 演技에 對한것은 닥처오는대로 해보겠다는 決心을 갖게되였습니다. 爾來 數次 同劇團에서 各種의 役을 맛타 四五個月 出演하는 동안 演技에 妙美를 조곰식 알게되였으며 따라 藝術이란 무엇인지도 어슴푸레 알게되였다고 生覺함니다.
그러나 그 劇團마저 그後 卽時 解散하게 되었음으로 할수없이 또 休息狀態에 있다가 李圭煥氏監督인 『무지개』에 暫間 出演하고나서 劇團「靑春座」에 몸을 옴기게 되었습니다. 그後 다시 中央舞臺로 자리를 다시금 박구었으니, 이 事實을 보드래두 當時에 우리네社會의 演劇人의 地位란 얼마나 悲慘하였는지 알수있을것입니다. 남의 나라의 演劇界나 映畵界의 이야기를 듯던지 할때에는 한층 더 슬픈 마음을 禁치 못하였으며, 우리들은 웨-이렇게 되어야 하나하고 再三 檢討도 하여 보았습니다. 中央舞臺에서 처음 「女優시나마루니스」라는 西洋劇을 只今은 故人이신 延鶴年氏의 演出로 『시나마루니쓰』가 되어 出演하였습니다만은, 全혀 익지못한 生活을 表現하기에 뭇척 힘드렸습니다. 맛침 이 中央舞臺와 前後하여 紀新洋行에서 『沈淸』을 撮影하게 되자 『沈淸』의 役을 맛허 『토-키-』로는 처음으로 出演하게 되었습니다. 監督은 安夕影氏이였었는데 이 映畵를 製作하는동안 여러가지로 社會와 演技를 아울너 알게되였습니다.
그 後 이여 天一映畵社製作『國境』에 出演하였다가 좀 더 工夫하려고 東京에 가서 一年餘있다가 今番에 撮影中인 明寶映畵社製作李炳逸氏監督인 『半島의봄』에 出演次로 나왔습니다.
以上이 나의 俳優生活의 重要한 記錄이라고 生覺합니다. 누구나 다 이 以上의 苦痛과 記錄을 가젔으리라고 生覺할 때 너무나 붓그러운 일입니다만은 적은 事實이나마 그대로 적었습니다. 特히 東京에 가서 있는동안은 各撮影所는 勿論이요, 音樂, 舞踊, 演劇을 듯고보고 그리고 배웠으니 前보다 聞見도 높아젔을것이요, 따라 앞으로의 『플랜』두 세웠습니다. 東京에 있는 各方面의 藝術人들은 모두 어찌나 明朗하고 情熱的인지 우리들도 그 點을 模範하여 좀더 씩씩한 사람이 되였으면 합니다.
우울을 물니치고 情熱과 沈着한 批判을 가저 서로의 短點을 미워말고 長點을 助長식혀 俳優로써 아니 人間으로써의 使命을 다-하였으면 합니다.
十一月二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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