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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생활 10년기―미술학교를 나와서―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배우 생활 10년기―미술학교를 나와서― 俳優生活十年記―美術學校를나와서―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김한(조선예흥사) 金漢(朝鮮藝興社)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1-01 昭和十六年一月
면    수 222 (222)
기사
[사진] 김한
「淑英娘子傳」에서「집없는天使」에이르기까지
朝鮮藝興社 金 漢

한발 한발 나에게서 머러저가는 내 靑春을 爲하여 나는 敢히 이 젹은 記錄을 갖는다 그것은 또한 아즉도 남어있는 人生의 里程表앞에서 일즉이 踏破한 나의 歲月에의 自己反省이기도하다.
그러나 지금 곱고 것치른 回憶의 門앞에 暝目하는 내마음이란 역시 嗟嘆과, 더부러 젊은날의 悔恨만이 綱膜을 크로즈·엎하는것은 웬일일가!

생각하면 自我에 充實치 못한輕薄한 功利性을 告白해야할는지도 몰은다.
사람에게있어 열여덜이라면 自身의 將來 할運命을 決定할때인 同時에 多彩한 꿈을 갖을수있는 단 한번의 機會가 아니였든가!
俳優라는것보다 當時 自然發生期를 넘지못한 朝鮮映畵界의 末席에 籍을 갖은것도 내가 열여덜나든해 가을부터이니 벌써 十年하고 五年이라는 歲月을 헤이게 된다. 十年이면 江山도 變한다는대 한사람의 生涯에있어 十五年이라면 거이 半生을 意味하지 않을수없는것이겠고 내가 갖었을 全靑春을 오로지 여기에 이바지한것인가-하면 한편 寂寞한 感懷를 禁할길 없다.
如何間 이 열여덜나든해는 分明히 나에게있어 하나의 分水嶺 그대로였다. 當時의社會風潮에 빛이여 中學生氣質이라고할가? 一介의中學生들까지가 政治·經濟·文化一般에 全存在로써 關心하고 干與하든 때인만치 四學年二學期에 盟休를하고 서둘든남어지 退學處分을 免할쑤없었으니 내딴은靑雲의志를 품고 軍官學校를 갈양으로 萬般의準備와 計劃을 세웠으나 그것마저 中止하지 않을수없게 되면서부터 나는 完全히 街頭의 少年이 되였었다.
이렇게 無爲徒食을 하든中 지금은 泰國(前■羅에서)英語敎師를 하고있는 李慶孫氏와 알게된것이 半生을 映畵界에 바친 契機가 될줄은 진정 想像도 못한일이였다.
當時 李慶孫氏는 「淑英娘子傳」을 製作中이였는대 나는 裝置·宣傳·엑스트라는 勿論 카메라助手에다가 監督助手까지를 하였으니 그때일을 生覺하면 정말 어린애들 솟꼽질하든것 같어서 우습기도 하지만 또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 젓가슴 주무르든 어린時節같이 그립기도 하다.
淑英娘子傳을 끝막을임시 羅雲奎氏는 「잘있거라」를 製作中이였고 李創用氏가 八峯原作의 「約婚」을 撮影하는것을 보고 翌年四月映畵界와는 完全히 訣別을 決心하고 東京으로 건너가 日本美術學校에 入學하였다. 지금도 역시 그렇지만 當時 朝鮮社會에서 演劇이나 映畵排優라면 그저 版에 찍은듯이 不良輩取扱을 하였든만큼 집의家親께서는 더 말할나위없고 親族들까지가 바로 보러들지도 알을만큼 蔑視하든 나머지 家親께서 차라리 藝術方面에 進出하랴거든 美術工夫를 하라는 懇曲한 勸告가 있기에 못이기는체하고 가고싶든 곳이기도하고 나自身도 方向을 바꾸어볼 마음으로 渡東한것이다.
그러나 여름방학에 돌아오니 李慶孫氏가 또 「방아打鈴」을 製作準備였든만큼 집에도 알니지않고 낮과 밤을 沈影, 朴齊行, 兩君과 새이다싶이 하면서 돌아다녔으나 女俳優가 없어서 찰영着手를 하지 못한 판이라 길에서나 어데서나 그저 容貌만 端正한 女子이면 尾行도하고 사람을 넣어 알어도보고 그야말고 不眠不休의 活動 끝에 하늘이 無心치 않었든지 某處에 奉職中이든 金素英孃을 發見한 우리들의 기쁨이란 정말 冲天 그대로였다. 그때 素英의나이는 十六, 七歲가령인가 되였을것이고 깜직할만큼 귀여운태가 後日의大成(!)을 믿게하였다.
뒤이여 洪海星氏와 崔承一, 李白水, 沈影, 羅雲奎 諸君과 미나도劇場(現第一劇場)에서 金子洋文作 「荷事」等의 傾向劇을 上演하다가 管轄署의 身體拘束을 보게되자 다시 渡東하고보니 學校工夫는 次置하고 舞臺美術에만 專念케되어 吉田謙吉, 田邊達, 伊藤壽一君들과 新舞臺裝置硏究會를 組織하여 築地小劇場 舞臺일도 보게되고 한편 舞踊도 배우러다니고 하는동안에 家運의衰退는 學資의融達을 不能케하였고 親舊들의 身勢를 입게하였다.
이러는동안 이떻게 이럭저럭 지나다가 卒業하고 歸鄕한것이 二十四歲때이다.
돌아와보니 그나마도 朝鮮映畵界는 말할쑤없는 沈滯狀態에 있었다. 다만 洪海星氏를 中心으로 劇藝術硏究會가 創立되었고 創立公演으로 고-고리作의 「檢察官」을 올니게되어 舞臺裝置를 맡어보았으나 所謂 海外文學派 사람들과의 對立으로 脫退하여 土月會後身인 太陽劇場에있든 徐月影, 朴齊行, 沈影等과 中間劇을標傍하고 春秋劇場이라는것을 갖게 되었었다.
그後 沈影君은 渡東하고 나는 朝鮮劇場企劃部 責任을보다가 支配人이라는 엉뚱한 椅子에까지 二年間이나 앉어있었으나 내딴은 다시 映畵界의 發展策을 苦心하든 남어지 李圭煥氏와 靑鳥映畵社에 加擔하여 「바다여 말하라」라는 作品을 맨들었다. 이때도 女俳優難으로 괴로웠으나 當時 樂園會舘에 있든 玄舜英孃을 負債 二十圓을 갚어주고 데려왔다. 勿論月給이라든가 手當이라든가는 生覺할쑤도 없을程度였고 그리고도 撮影費가 不足하여 舍兄의援助로겨우 製作을 完了하게되었다.
그後 京城撮影所에서 이름도 잊은 映畵 五六本을 製作하는동안도 出演하는것만이 아니라 쎗트의 못(釘)질까지하는 身勢를 역시 免할쑤없었고 겨우 二十七歲되든해 安鍾和氏監督인 「銀河에흘으는情熱」뒤의 朴基采作品「春風」을 製作하면서부터 多少 質的向上의 兆候도 微弱하나마 보이여왔다.
그러나 나는 「바다여 말하라」라는 作品製作時 負債의責任上 直接 필림을 들고 地方興行의길을 떠나지않을수없었고 얼마후에 돌아온때는 旅費를 除하고보니 負債는 負債대로있고 필림만 뺐기게될때 그저 웃어버리는外 別無道理였다.
그즈음이 朝鮮에도 發聲映畵撮影이 始作될 무릅이다. 李弼雨君이 新興한 京城撮影所에서 發聲版 「春香傳」을 撮影하든때인대, 거기다 더구나 同時錄音이니만치 웃지못할 喜悲劇이 續出한것은 演技者들이 臺詞를 웨이지 못하는 것보다도 臺詞의內容을 理解치못하고 얼토 당토않은 臺詞를 하게되어 N·G가 몇百尺식이나 날지경이니 벌써 朝鮮映畵界는 이때부터 新人을 待望하는소리는 높았든것이고 演技者들의 敎養이 當面問題로써 問題된것이였다.
그後 京城撮影所도 閉門케되어 나는 看板店經營까지를 하였으나 生活難의 괴로운 時間이 約二年間 繼續될뿐이였다. 때마츰 上海에서 全昌根이 歸鄕하여 李創用, 李明雨, 沈影, 諸氏와 「福地萬里」를 企劃케되어 關係하였으나, 聖峯映畵園을 李圭煥氏와 故王平君과 同人制의 創立을 보아 손을 끊었다.
東寶와의 提携下에 徐光霧監督으로 「軍用列車」를 製作하고 議政府에 撮影所까지 갖게되어 비로서 宿望의 映畵企業化까지 보게될제 崔南周君의 앞잡이였든 白瑩權의登場으로 聖峯映畵園은 不得已 朝映에 賣身케되었었다. 아마 이것이 朝鮮映畵界에있어 大資本의 鐵蹄밑에 蹂躙된 最初의 記錄일것이다.

이外로 「돌쇠」, 「授業料」의 出演과 「안해의倫理」, 「집없는天使」에 출연중이나
要컨대 問題는 上記한바와같이 나의 十餘年間 俳優生活이란 演劇·映畵를 莫論하고 한사람의 優秀한演技者가 되기前에 우리에게 賦與된 數多한役務를 甘受하지 않을수없었든 朝鮮映畵界의 過渡期的諸相은 一種의 開拓者的使命을 無條件하고 强要하였었다는 點일것이다.
하나의 矜持를 許할쑤있다면 우리들 十餘年의歲月을 映畵界에 바친사람들은 역시 어느程度의 企業化의 段階에까지 發展한 오늘의 朝鮮映畵界를 成育시킨者일것이고 그런意味에서 우리는 앞으로 이方面에 進出하려는 사람들과 또는 朝鮮映畵界가 豪華한築城을 갖는대있어 有用한 無名之石이 되리라는것은 誇張이 아니여야할것이다.
이제 우리앞에는 朝鮮映畵의 完全한 企業化와함께 優秀한作品製作이라는 課題만이 未來와함께 기다리고있고 또 거기에만 廣義의 文化人으로서의 使命이 있을것이다.

附記=좀더 年代를 따라 作品名과 關聯하여 監督者及出演者를 列記하면서 나의 十年記를 쓰려하였으나, 方今 朝鮮藝術社作品 「안해의論理」에 出演中임으로 詳記치못함을 遺憾히 生覺하오며 編輯者와 讀者에게未安을謝過합니다. -筆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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