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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특집 조선 문화 및 산업 박람회―영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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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지상 특집 조선 문화 및 산업 박람회―영화편― 誌上特輯朝鮮文化及産業博覽會―映畵篇―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삼천리사 편집국 三千里社編輯局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0-05 昭和十五年五月
면    수 226 (226)
기사
(전략)
名作 「旅路, 春香傳」
羅雲奎, 申一仙으로부터文藝峰沈影 等의名優에이르기까지의二十年間의
—朝鮮映畵發達史—
朝鮮映畵史는 內地나 支那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活動寫眞의 輸入으로부터 始作된다. 明治三十六年頃 東京 興行業者 吉澤商會의손을 거처서 輸入公開된 英米烟草會社의 宣傳필림이 그 嚆矢라고 한다. 그러나 興行物로서 活動寫眞이 登場한것은 明治四十年부터 光武臺에서였고, 本格的으로 常設興行된것은 亦是 大正初葉以後이다. 種類는 勿論最初엔 實寫物로 佛蘭西의 파티이短篇亞米利加의 뿌류―바―스喜劇, 유니바―살長篇等의 外國物과, 內地의 新派物이였다. 이것은 아마 內地와 別로다르지 않으리라.
이것이 所謂 辯士와 樂隊로 된, 옛追憶이 새로운 活動寫眞舘時代이다 이 時代는 常設舘도 京城에 五六個所, 地方大都市에 四五個所, 그리고非常設舘等을 모두合해서 普及程度도 매우 低劣하였다. 이 때는 周知하는바와 같이 아직 映畵라고하는 述語조차 생기지 않은 時代여서 필림은 單只 活動하는 寫眞으로써 재미의 對象에서 지나지 못했다. 이런 狀態는朝鮮만이 아니고 內地나 原産地인外國에서도 同一했던 模樣이다. 필림이 藝術이라고는 누구나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世界映畵史에서 말하는 活動寫眞時代를 西洋이나 內地에서는 製作하야 보았지만 우리 朝鮮은 專혀보기만하는 한便이었다.
그러므로 儼密한 意味에서 말하면 朝鮮映畵史에는 活動寫眞時代라는것이 있을수 없는것이다. 보기만하고 만들지않는 歷史는 없다. 歷史는 언제나 만드는일과, 되여지는일의 歷史라고말하기때 문이다.
그러므로 朝鮮에 있어서 儼密한 意味의 映畵史는 當然 製作의 開始부터 始作되여야 할것이다.
X
그러면 朝鮮에서는 언제부터 映畵의 製作이始作되였다하면 大正七, 八年度에 劇團에서 만든 連鎖劇필림부터다. 新劇座, 革新團 文藝團等이 東京서부터 技師를 불러서 亦是 內地의 新派連鎖劇을 模倣하여 演劇사이 사이에 演劇과 連結해 보인것이다.
예전 사이렌트時代에 크랑크를 쥐고 있었고, 지금은 錄音技術을 하고 있는 李承雨氏같은이가 벌서 이 時代의 連鎻劇필림撮影者였었다.
그러나 連鎖劇필림을 우리는 곧映畵라고는 할수없다. 그것은 獨立한 作品이 아니기때문이다. 單純히 映畵의胎生에 지나지 않는다.
大正九年度에 이르러서 聚星座의 金陶山一行이 京畿道廳의 委囑으로 만든 호열자豫防宣傳映畵와, 仝十年 尹白南氏가 遞信局依賴로 만든 貯畜思想獎勵映畵 『月下의盟誓』가 完全한朝鮮映畵의 嚆矢이다.
그러나 이 二作品으로 말하드래도 連鎖劇필림程度는 아니지만 完全히獨立한 映畵라고는 하기어렵다. 前者가 만일 演劇의 附屬物이라면, 後者는宣傳手段에 지나지않기때문이다. 朝鮮映畵史를 말하매, 後者를 最初의 作品으로서 枚舉하는것은 그 作品의 內容은 어떻든지, 다른 藝術의 手段을 빌지않고 映畵自體가 그렇기때문이다
좀더 完全한 映畵가 되기는 大正十一年 黃金座와 朝鮮劇場을 經營하던興行師 早川某가 東亞文化協會의名義로 만든 『春香傳』이다. 이 映畵에는 當時 人氣있는 辯士였던 金肇盛이 出演하여 觀客의 歡迎을 받았다

一年間演劇·映畵
觀覽客入場料
總督府의 調査에 依하면 昭和十三年度中 演劇場, 映畵舘, 競馬場, 麻省場, 撞球場等의 總入場한 人員數가 一千八百八萬七百七人이오, 總入場料가 五百八十七萬八千八百七十六圓이였다. 이中에서 映畵舘入場者가 一千二百五十萬一千三百人이오, 그入場料가 三百八十九萬四千九百圓이여서 거의 全髓의過半을 占領하였다. 그리고 演劇場入場者는 百九萬二千二百人이오, 入場料는 五十六萬六千五百圓이였다. 끝으로 參考로 撞球場入場은 二百三十九萬八千七百人(入場料는 五十四萬二千圓)이오, 演藝場入場者는 百四十七萬五百五十九人 (七十萬一千四百圓)이다.

原作이 有名한 春香傳인 關係도 있었고, 또 大衆的場所에 처음으로 스크린에 비치는 朝鮮 의 人物과 風景을 보는 珍味가 더하여 興行에는成功한것이다.
이것을 契機로 釜山에 朝鮮キネマ株式會社라고하는 公稱資本二十萬圓의 內地人企業會社가 생겨서 安鍾和, 李月華, 出演의 「바다의 秘曲」, 尹白南監督의 「雲英傳」等의 作品을 내였지만 會社는 企業的으로 되지않았다. 朝鮮映畵를 大規模企業의 對象으로하기에는 時期尙早였던것이다.
要컨데 저들은 誤算한것이다.
作品은 「春香傳」 「雲英傳」이 古代小說의 映畵化된 意味에서 同一하였고, 「바다의秘曲」은 戀愛劇이오, 「神의粧」은 現代劇으로 朝鮮의 人情風俗을 映畵로 본다는것以上에 지나지않었다.
그러나 이 會社로부터, 草創期朝鮮映畵界의 柱石이된 尹白南, 安鍾和, 李慶孫, 羅雲奎, 南宮雲, 李月華, 鄭基鐸等의 諸人材를 낸것은 잊지못할功積이다.
그後, 尹白南씨가 獨立푸로덕슌을京城에 創立하여, 李慶孫監督, 羅雲奎主演의 「沈淸傳」을 지었다가 解散하였으나 이 作品으로부터 朝鮮映畵가 조금 確實한 길에 들어가는 感을 느낀다.
같은 古代小說을 映畵化해도 「春香傳」이나 「雲英傳」보다는 퍽 나을뿐더러 이 映畵는 監督으로서의 李慶孫氏와 좋은 演技者로서의 羅雲奎氏를 世上에 보낸 紀念할만한 作品이다.
그後, 李弼雨氏가 當時 朝鮮에 남아있던 連載漫畵 「멍텅구리」를 映畵化하였고, 高麗映畵製作所라는 곳에서新派小說 「雙玉淚」를 만들고, 또 前記의 東亞文化協會에서 妓生康明化의實記 「悲戀曲」과 「興夫傳」等을 만들었으나 모두 不足한 點이 많았다. 興行師의 돈벌主義와 熱心있는 映畵人들의 盲目的試驗이 지나지않았다.
李慶孫氏가 尹白南푸로덕슌의 宋仁奎, 南宮雲, 金靜淑을 시켜서 지은 李光洙氏의 小說 「開拓者」의 映畵化도 또 失敗하였다.
繼續하여 新小說의 作者도, 內地新派小說等의 飜案者로서 初創期 朝鮮文壇의 功勞者였던 趙一齋氏가 鷄林映畵協會를 일으켜 「金色夜叉」를 飜案「長恨夢」을 製作하였고, 두번째 尹白南監督으로 朝鮮서 처음으로 內地風의 活劇調時代劇을 만들었으나 모두 成功을 보지못했다. 더욱이 後者는 興行으로 全然 失敗하여 以後他人을 시켜서 活劇調時代劇이라는것을 만들 慾心을 아주 버리게 하였다.
이 協會가 意義가 있다고 하며는 朝鮮키네마會社以後 가장 많은, 그리고 오래 繼續되여 거의라고 하여도 좋으리만치 朝鮮映畵界의 人材를 기르고 있은點이다.
이 時代는 朝鮮映畵史로 말하면 푸로덕슌創立時代로 映畵를 製作한 以外에도 京城市內를 散策하면 곳곳이 XX푸로덕슌, XX映畵製作所라는 看板을 볼수있는 時代였다. 映畵에의情緖가 非常하게 澎漲했던 時代다. 그러나 作品으로 이렇다할만한것이 남았고, 그저 돈만 있으면 어쨋든 製作! 製作! 하며, 俳優와 監督이 되려고 映畵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時代였었다.
그러나 이 時代가 朝鮮映畵史의 土臺를 쌓아올라가고있은 時代였다.
外國에서는 活動寫眞時代를 거처서 藝術로서의 映畵時代가 始作되는 時代였고, 朝鮮映畵는 暗中 盲目的試驗으로부터 漸次로 어떤 方向이 보이려고하는 時代였었다.
朝鮮映畵를 참다운 映畵답게하고, 또 朝鮮映畵다운 映畵를 만들기는 大正十五年 羅雲奎의 原作, 監督, 主演인 「아리랑」의 上映부터다. 이 作品은 本町 某商人이 出資하여서 된 朝鮮키네마푸로덕슌의 作品이다. 이 作品을 만들기前 朝鮮키네마푸로덕슌은 當時 內地에서 流行歌로 映畵로 大人氣를 占領하고있든 「籠中鳥」를 津守等監督에 李圭卨主演 羅雲奎助演으로 만들었지만 이 作品은 以前 朝鮮映畵보다 百步나 進步된作品으로 朝鮮키네마푸로덕슌이라는것을 만들게된 契機가 되였고 羅雲奎라는 俳優의 存在를 確實히 世上에認識시킨 功積이 있었다.
이러한 經路로 두번째 만든 「아리랑」은 絶對人氣를 博하여 興行成績이後年에 이르기까지 좋았을뿐더러 朝鮮映畵史上 사이렌트時代 最大의 傑作이 되였다.
이 作品에는 稚拙하지만 朝鮮사람들의 生活그것과, 感情, 思想, 氣分의 眞實性의 一端이 잘 表現되여있다. 사람들은 이 作品에서 單純한 朝鮮人風景, 人物 風俗以上의 그 무엇을 본것이다. 거기에는 물건以上의 무엇이 있는것처럼 생각한것이다.
이 作品의 成功은 또, 그 內容에 그칠뿐 아니라 技術上으로 보드래도 在來의 모든 朝鮮映畵의 水準을 突破하였다. 이만하면 單純히 好奇心에 끌리여 보는 以外에 滋味와 어떤 무엇을 얻고저 安心하고期待하면서 보게쯤되였다.
이 作品을 通하여 一世大人氣의 女優申一仙이 世上에 나타났다.

主要映畵社及製作所
□朝鮮映畵株式會社 社長崔南周 製作部長李載明, 鐘路三丁目三三
(電光三一四四)撮影所京元線議政府
□高麗映畵會社 社長李創用, 鐘路二丁目七 (電光七八O, 本二六一七)
□漢陽映畵社 社長金甲起 鐘路, 二丁目漢陽ビル內 (電光一六OO)
□半島映畵製作所 代表方漢駿, 鐘路二丁目七 (電光七八O)
□劇硏座映畵部 徐恒錫, 苑南町一六O
□朝鮮文化映畵協會 代表河通男, 南山町三丁目十九
其他現在活動を休止하고있는極光映畵社, 金剛키네마等이있다

이 作品이 發展된 時期가 마침 觀客들이 벌서 朝鮮의 人物이며 風景이며, 風習이 나온다고 덮어놓고, 朝鮮映畵를 볼수없게 되게된 때이여서 매우 賞讃받고 歡待를 받았다.
그다음이 「風雲兒」 「野鼠」 「금붕어」 等 繼續하여 好調를 보였으며 羅雲奎의 地位는 벌서 朝鮮映畵界의 中心이 되였다. 그는 「아리랑」에서 보는바와같이 人氣俳優만이 아니고 좋은 씨나리오作家였으며, 보다도 좋은演出者였다.
이 몇해동안을 羅雲奎時代라고 이름지어도, 좋으리만치 되였다. 事實 사이렌트時代에 朝鮮映畵界에는 羅雲奎보다 나은 映畵作家는 나지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反對가 있을지 모르나 나는 朝鮮映畵의 全사이렌크時代를 羅雲奎時代라고 하고싶다.
昭和六年에 오랫동안 쉬고있던 鷄林映畵協會가 詩人沈熏의 原作監督으로 「먼동이틀때」를 姜弘植, 申一仙의 主演으로 製作下애 朝鮮映畵史上 드물게보는 良心的製作態度를 보였다. 이 作品은 確實히 「아리랑」과 같이 記憶해둘만한 作品이다.
그와 前後하여 李圭离氏가 製作한 「不忘曲」, 「紅戀悲戀」, 極東키네마의 「怪人의正體」大陸키네마의 「支那街의秘密」, 朝鮮映畵製作所의 「運命」, 其外몇몇가지가 있으나 별로 言及할 程度는 못된다.
그中 平壤키네마에서 李景孫氏가 監督한 「椿姬」는 아름다운 映畵였다.
昭和二年頃 常設舘團成社映畵部에서 當時 辯士였던 金永焌氏가 「落花流水」 「종소래」 「세동무」等을 製作하여 觀客을 끌었으나 이것을 아즉 俗化하여 商業主義化한 作品이었다.
이 時代에 羅雲奎氏는 朝鮮키네마를 그만두고 獨立個人푸로덕슌을 가지고, 「잘있거라」 「玉女」 「사나이」 「사랑을찾아서」 「벙어리三龍이」等을 製作하여 自己의 作品性格을 維持하였지만 當時 映畵界의 一部에서는 傾向 映畵에의 傾向이 생겼다.
이것은 安鍾和氏가 主宰하고있던 朝鮮映畵藝術協會의 젊은 멤버―들과 左翼文化人과의 合流로 「流浪」 「昏街」 그다음의 「火輪」等을 만들었다 이것은 故金幽影氏의 作品이였다. 여기에 比하면 羅氏의 作品은 자못 民族的이라고 할수있다.
이것이 昭和三年부터 五六年頃까지의 朝鮮映畵의 狀况인데 一種 內的分裂時代이여서 新興에畵藝術同盟이라는 團體가 생기기도하고, 갚프映畵部가 생기기도하여 徐光霽氏等으로 因하여 朝鮮에 처음으로 映畵批評과評論이 생긴것도 이 時期다.
昭和八九年頃부터 羅雲奎氏도 스템풀어 떨어저 여러가지의 作品을 만들었으나 朝鮮映畵는 도모지 進步하는 形跡이 보이지않았다.
羅氏의 「七番通小事件」, 「鐘路」等은 「아리랑」에 比하면 말도 할수없는愚作이며 「아리랑」二篇, 三篇도 그러한 것이었다.
安鍾和氏가 메가폰을 듣기 始作하여 「꽃장사」 「銀河에흐르는情熱」 「靑春의十字路」等을 製作하고, 中央映畵社方漢駿氏가 「撤水車」를 製作하였으며 李圭煥氏가 「임자없는 나룻배」 「바다여 말하라」와, 朴基釆氏가 「春風」을 製作하였지만 모두 새로운 時期를지을만한 作品은 되지못했다.
그러나 三四年 沈滯後昭和九, 年頃부터 朝鮮映畵는 再建期에 들어가는 感이 있어서 技術的으로 아주 새로운 時期를 開拓하기 始作하였다.
監督도 尹白南, 李慶孫, 羅雲奎와같은 사람들은第一線으로부터 退却하고 李圭煥, 方漢駿, 朴基釆, 尹逢春等 新人들이 登場하였으며, 安鍾和氏가 演劇으로부터 多年間 放棄하였던 映畵進出을 하였다.
또 俳優에도 沈影, 金漠, 獨銀麒, 田澤二, 金一海等 男優와, 文藝峯, 金素英, 金信載, 玄舜英等 女優에게서 보여지는바대로 새로운 제네레슌이 成長했다.
要컨대 昭和八, 九年間의 朝鮮映畵界는 사이렌트時代의 末期였었고 토-키時代를 맞으려고 속으로 焦燥하였던 時代였다.
當時의 朝鮮映畵에 지워진 任務는 하로―바삐 사이렌트時代에서 脫出하여야할 일이있다.
이때는 벌서 外國映畵뿐만 아니라 內地映畵도 完全히 토-키時代에 들어간 때였다.
그러나 이 時期의 괴로운 試錬을받은 사람들이 토-키로된 今日의 朝鮮映畵界를 形成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인것을 생각하면 實로 感懷가 깊을것이다.
X
最初의 朝鮮토-키는 昭和十年 京城撮影所에서 李弼雨, 李明雨兄弟가製作한 「春香傳」이다. 이 映畵를 通하여 朝鮮語가 처음으로 필림에 錄音되여진 모양이다. 이 映畵는 자못 歡迎을 받았다. 그것은 初期의 朝鮮映畵(사이렌트)가 받은것과 마찬가지로 朝鮮의 토―키라는 單純한 理由에서였다.
其後 京城撮影所에서는 洪開明氏의 「아리랑고개」 李明雨氏의 「薔花紅戀傳」, 「洪吉童」, 漢陽映畵社에서는 「아리랑三篇」이 토-키로 製作되였지만 벌서 사람들은 토-키「春香傳」을 보는것과 같은 寬大함을 가지고 臨하지 못했다.

主要演劇場과定員
京城府
場 名 町 名 定 員
明 治 座 明治町 一五OO
若草映畵劇場 若草町 一二OO
黃 金 座 黃金町 一二三六
大 陸 劇 場 授恩町 八五O
浪 花 舘 明治町 六五O
京 龍 舘 漢江通 七五O
東 洋 劇 場 竹添町 八OO
大邱府
新 興 舘 田 町 一OOO
萬 鏡 舘 京 町 八五O
永 樂 舘 田 町 八OO
仁川府
瓢 舘 新 町 六七O
愛 舘 京 町 八OO
平壤府
大衆映畵劇場 櫻 町
偕 樂 舘 壽 町 一二OO
平壤키네마 櫻 町 五三八
釜山府
相 生 舘 本 町 九OO
寶 來 舘 幸 町 八OO
昭 和 舘 幸 町 一一OO

單純한 토-키가 아니라 어느程度까지 外國이나 內地의 作品水準에接近치 않으면 아니되였다.
이러한 貴重한 時期에 李圭煥氏는 鈴木重吉氏와 같이 「旅路」를 製作하였다. 이 作品이 어느程度까지가 朝鮮人의 作品인지는 判斷키 어렵지만 朝鮮의 토―키를 盤石우에 세운 作品인것은 事實이다. 사람들은 「아리랑」을 볼때와같이 기뻐했다. 여러가지 缺點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이 映畵가 今日까지 토-키로된 以後의 朝鮮映畵中 가장 優良한 作品임에 틀림없다.
사이렌트 「아리랑」을 成功시킨것과 같이 「旅路」를 成功시킨것도 리알리즘이었다. 이 內容이 아무리 首肯키 어려운때라도 作者가 生活의 眞實을 追求하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感動을 받는것이다.
이밖에 當時까지 朝鮮에서는 토-키外에 아직 사이렌트가 製作되여, 安鍾花氏의 「人生航路」申敬均氏의 「純情海峽」과, 洪開明氏가 漢陽映畵社에서 지은 「靑春部隊」를 最後로 사이렌트는 完全히 朝鮮映畵에서 자최를 감추었다. 때는 昭和十二年이었다.
이해에 記錄할만한 作品으로서는 畵家安夕影氏가 紀新洋行에서 製作한「沈淸」으로 이 作品에 있어서 安氏는 繪畵的인 아름다움과, 古代小說을 映畵化하는데 새로운 機軸을 보였다.
이로부터 本格的으로 토-키時代가 始作되여 製作도 旺盛하여젔다. 方漢駿氏의 「漢江」, 尹逢春氏의「圖生錄」, 評論家徐光霽氏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使用한 「軍用列車」等 繼續하여 發表되였다.
이때로부터 朝鮮映畵에 있어서 企業化의 運命이 시작되여서 朝鮮映畵會社가 設立되여 第一回作品으로 朴基釆氏가 「無情」, 李圭煥氏가 「새出發」을 製作하였다.
토-키는 사이렌트와 달라서 莫大한 生産費가 必要하며, 또 組織的인 生産슈템을 갖지않으면 朝鮮映畵의이 以上의 發展은 念慮되는바 아무래도 큰 企業的組織이 必要하다.
하지만 朝鮮映畵는 二回作을 내놓을뿐 企業機關으로써 움직이지못하게 되여, 恰似히 四五年前의 畵界가 하루바삐 사이렌트 時代에서 脫出할것을 課題로 삼든것처럼 今日의 토-키는 하루바삐 小規模製作의 狀態를 脫出해야할것이 또 一課題가 되지않았나 하고 생각된다.
其後 安哲永氏가 「漁火」, 金幽影氏가 劇硏座映畵部에서 「愛戀頌」, 東洋劇場에서 「사랑에속고돈에울고」等을製作하고, 方漢駛氏가 「城隍堂」, 漢陽映畵社의 「歸着地」, 崔寅圭氏等의 「國境」 製作되였지만 모두 에포―크를 만들 名作은 없었다.
단지 朝鮮의 監督들이 顯著히 技術編重에 빠저 專혀 職工이 되려고 하여가는 氣風이 보였다.
이것은 作日 사이렌트時代를 나온 朝鮮映畵로서 爲先 새技術을 배우지않으면 아니될 事情을 생각할때 一應肯定할만한것이다.
그러나 朝鮮映畵가 하루바삐 이狀態에서 버서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일도 보다크게 眞實하다.
現在 製作中으로 發表되지않은 高麗映畵社에서 全昌根氏가 三年計劃으로 製作하는 大作 「福地萬里」, 崔寅圭, 方漢駛氏의 「授業料」와, 金幽影氏의 遺作 「水仙花」, 申敬均氏의 「處女圖」, 安夕影氏의 「志願兵」, 漢陽映畵社의 「新開地」等이 있다.
如何間 自己의 모랄의 獲得과 企業化에의 길이 朝鮮映畵 今後의 運命을 決定하는것이라고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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