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문헌
검색 > 문헌 > 기사
나의 장한가―하얼빈에서 신경으로 애아를 안고 울면서 표랑하던 때의 나의 슬픔의 기록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나의 장한가―하얼빈에서 신경으로 애아를 안고 울면서 표랑하던 때의 나의 슬픔의 기록 나의長恨歌―哈爾賓에서新京으로愛兒를안고울면서漂浪하든때의나의슬픔의記錄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김연실 金蓮實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0-04 昭和十五年四月
면    수 192 (192)
기사
[사진] 김연실
내가 滿洲를 떠나가든때는 이태전―나무잎이 다떠러저가는 늦인가을이었읍니다. 아이아버지가 갑작이 戰場에 나가게되고 나혼자 아이를 데리고 남아있게되고 본즉 앞이 캄캄하지않을수없었읍니다. 世上에 女子가혼자 살아간다는것이 도무지 쉽지못한일인줄 내지내온過去가 내게 가르처 준바가있어서 잘 알고 있긴했으나 그때처럼 당황해본적은 없었읍니다. 
『아이를 데리구 어떻게 살까』
가슴에 이런 걱정만 꽉찼읍니다. 다시말하면, 어머니로서의사랑과 임무만이있을뿐 그外에 다른생각은 없었읍니다. 
滿洲의 가을은 겨울가치 추웠읍니다. 山하나 보이지않는 넓은大地에 흙바람만 끼언저서 내마음은 서글프기만 했읍니다. 하나 서글픈기분을 죽여가며 현실과싸와야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지않을수없었읍니다. 
처음到着한곳이 新京이었읍니다. 新京서 스탠드바-를經營했읍니다. 마는 내이름을 내걸기가 싫여서 內地人女給의이름으로했드니 도무지 사람이 오지않고 날마다왼통밋저만 가는것입니다. 서울「浪樂」時代에 배워뒀든 솜씨로 내가 손수「쿡」노릇까지 해가면서 하는데도 豫算이맏지않었읍니다. 하는수없이 그것을 팔아버리고 할빈어느홀에서 노래를 불러주기로하고 한달에 百八十圓식俸給을定하고 그리로 갔읍니다. 살든살림과 아이는 다른사람에게 매끼고-. 
하나 그것도 오래 계속할수없었읍니다. 百八十圓식의 봉급이라면, 누가 생각하든 여유가있으리라할것입니다. 그렇지만 朝鮮과는 달러서 朝鮮서의 百圓收入보다 어려운 형편이 었읍니다. 더구나 아이를 남한테 매낀것이 마음에 안되여서 한달에 네번식은 꼭 아이보러할빈서 新京까지 來往해야되는군요, 할빈서 新京까지의車삯은 往復八圓이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이면 한달에네번……한달에 네번이면 車삯만해도 二十四圓입니다. 거기 또 남을매껴서살림을하게되자니까, 적어도 한달에 百圓넘어 消費됩니다. 그럼에도不拘하고 아이가 나와가치있을때처럼 充實치못하지요, 結局 아이가 病이나서 新京에도라오고 말었읍니다. 
다시 新京서 바-에 나가게되었읍니다. 그바-는 내가 팔아넘긴 스텐드바-엿는데, 그것을 크게改築해서 한참번창하든때입니다. 新京계신이中에 아는이들도 많이 오섰지만, 朝鮮서 들어오는 이들도 으레 한번식은 여기를 오시었읍니다. 아는분이나 모르는분이나 고향에서 오신이라면 다 반가워서 처음얼마간은 그이들 만나기를 주저도 했으나 나종엔 나도 모르는사이에 그이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기게 되었읍니다 반가운것도 고향사람 언제나 싫지않은것 또한 고향소식이었읍니다. 고향의어른들과 고향소식을 듣는저녁처럼 즐거운때는없었읍니다. 
서울을 떠나든때는 서울에 다시 도라오지않어도 좋을상싶드니만, 날이가고달이 가는사이에 그리워지는것은 고향이엇읍니다. 게절이 박귀는때마다, 고향山川을 생각하게되었고, 바람이불면 바람이 불어서 고향이 그립고 비가 오면 비가와서 고향이 그립고 달이 밝으면 밝어서 고향이 그리웠읍니다. 나만이 아니라 고향을 떠난사람들의 마음을 다-마찬가지인양싶었읍니다. 아모리 興에 깊다가도 고향이야기만하면, 슬픈表情을 짓는일이 많었읍니다. 고향이란 어머님의품과같이 누구에게나 살틀한것이고 그리워지는것이라 비로소 깨달았읍니다. 
달뜬밤 總督府앞넓은 길보다 더넓은 新作路에 馬車를달리는 맛도 좋지않은것은 아니지만, 아모리해야 거기서고향의情緖를 찾어낼수는 없었읍니다. 

이렇게 고향이 밧삭 그리워지든때 였읍니다. 高麗映畵社에서「福地萬里」撮影하러 新京에到着하게되었읍니다거저 웬만침 아는이들이래도 반가울것인데 모다 十餘年을 劇界, 映畵界에서 똑같이 고생하든분들이매 그반가움이 얼마나했겠읍니까. 
내가 여기 이야기하지않어도 讀者 여러분은 짐작하시리다. 滿洲映畵會社에서 入社하라고 누차 사람을 내세워 교섭을하는것도 나는 다그만두고, 高麗映畵社撮影班과함께 朝鮮에 오고말었읍니다. 그래서 지금은 弘濟町에 새로 建設된高協村에서 애기와함께 폭은히 살어갑니다. 앞으로도 늘 이렇게 平靜한生活을 하리라고믿습니다. 아이도 인제 거름발을 타서아장 아장 걸습니다. 
봄이오면 昌慶苑, 德壽宮에 데리고가서 꽃구경도하고 잔디밭우에서 놀기도하려고 지금부터 洋服을 사놓고 기다립니다. 
고향의 봄볕은 우리애기를 하로에 한치씩 키워줄것 같이 생각됩니다.
이메일주소 무단 수집거부 권리침해신고 문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