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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 등 당대 가인이 모여 『홍루·정원』을 말하는 좌담회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문예봉 등 당대 가인이 모여 『홍루·정원』을 말하는 좌담회 文藝峰等當代佳人이모여『紅淚·情怨』을말하는座談會
종    류 좌담 座談
필    자 문예봉․남궁선․복혜숙․남해연․김선영․이서구․최정희․박계주 文藝峯․南宮仙․卜惠淑․南海燕․金鮮英․李瑞求․崔貞熙․朴啓周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40-04 昭和十五年四月
면    수 184 (184)
기사
[그림] 漫畵는 文藝峯孃
出席者
文 藝 峯 南 宮 仙
卜 惠 淑 南 海 燕
金 鮮 英
~~~~~~~~~~~~~~~~~~~
外에 李瑞求, 崔貞熙, 朴啓周
★陰曆으로正月대보름날밤, 서울장안에서

出席五氏紹介
★文 藝 峰
조선서 처음나온 토-기映畵「春香」에 春香의役을맡어一躍名優의 이름을 날린뒤 계속하여 「나그네」「새生活」等여러作品에나와, 그美貌와 아울러 當代人氣를 獨占하고있다. 조선의 入江たか子요, 朝鮮의 뎃드릿히요, 조선의 李香蘭이로 그名聲은 멀리 海外에까지 흐르고있다. 故鄕은 咸鏡道咸興. 
★卜 惠 淑
橫濱神學校時代에延鶴年氏들과함께「土月會」를組織하여이땅에처음으로 新劇의길을연뒤「갓추사」로 그의이름이날리나, 映畵로, 演劇으로라디오로「조선에金剛山과卜惠淑의이름을모르는이가 없으리만치 표푸라한巨然한存在가되어있다. 그役도老役도可, 少女도可, 勢帶描寫도可也, 萬事가다可也다. 故鄕은忠淸道天安. 
★南 宮 仙
梨花女高時節에演劇잘하고노래잘하기로有名하더니學校를나오자이어劇藝術硏究會에加入하여 연극을하고 노래를부르고했다. 한동안은 연극도 그만두고聲樂工夫를東京가서하고있었으나如意치못하여다시劇界에발을디디게되었다, 아직기억에 사라안지는것은中央舞臺에서「하이딜·베르히」를公演할때女主公「케티」로粉裝하여많은사람의가슴을리때었다. 
★金 鮮 英
黃澈, 徐月影氏等과오랫동안靑春座의스타-로이름을날렸다, 고향은서울, 學校는女子商業을나왔다, 얼마전에 結婚하여昌成町에서얌전한며느리노릇하는데인젠연극을안하겠느냐고하면 시아버지가 무서워서 못한다고 고개를살래살래내젔는다. 
★南 海 燕
京城女子商業을나온뒤東京건너가서오랫동안있으면서도劇藝術에많은硏究를하고있다가朝鮮돌아와, 한때全盛時代이던新建設에서많은活躍을하다가그團體가없어지든때所謂全州事件이라하는事件에혐의자로全州警察署에서여러달을고생하든이로, 그뒤生活을爲해서東洋劇場에도있은일이있으나 지금은 아무데도 所屬해있지않다. 

多情多恨한내半生

崔貞熙―(本社側) 오늘은 正月大보름날밤, 창밖에는 둥두렷한 雪月이 長安萬戶를 은은히 비최어줍니다. 이고요한 밤, 여러분과자리를 가치하여 葡萄酒잔을 기울면서 여러분의 多情多恨하실 그말씀을 듣게되니 기쁘외다. 아마우리들 시골서는 모두다 새옷갈아입은 閣氏들이 이날밤, 강변에나가「다리봅기」를 하든지, 그렇지않으면「정화水」를 떠놓고「人生의꿈」이 아름다워지기를 하늘에 빌고 있을것입니다. 故鄕을 버리고 서울장안에 모으게된 우리들은 그리운 고향도 생각하며 옛날의古典的 香氣도 이명절날에서 찾으면서 이밤이 다 새도록, 정말다 새도록 고요히 이야기하며 밝힙시다. 
그런데 오늘저녁 司會는 李瑞求氏가 맡아하여주섰으면 좋겠어요, 女性끼리만 모인자리에선 암만해도 사내어른들이 있어야 議事가 進行되더군요, 우리끼리만이면 자꾸 웃기만하고 말씀덜 잘 안해주시니깐……. 
李瑞求―御史行次한다고 길을말숙하게 닦아놓으니 웬거지가 먼저지나가더라고, 이렇게 어여쁜 아가씨들 오게한자리가 작만되자나같은 사내가 처음나오게되니좀 부끄럽구먼요, ……그러면 말씀대로 司會者되어 말슴을 進行키로하지요. 
文藝峯氏나 卜惠淑氏나 모두 여기 앉은 여러분에게도 슬픔이 있을까요. 세상사람들은, 여기 모인다섯분은 얼굴잘났것다, 재주있것다, 글잘하고 춤잘추것다, 멋 들어지것다, 어느모로 보든지 恨嘆이나 不平이 없을줄로 알것인데 그렇게 남들이 부러워 하는 當代佳人이 되시고도 혹시 눈물짓는 때가 있어요? 한숨을 쉬고, 무엔가 되지않어서 애달버 하는때가 있을가요. 
여러萬名의 팬을 가지고서 映畵로 舞台로, 音樂壇으로「조선의愛人」노릇을 하는 여러분의 그 어디, 가슴속 감추어둔「身勢打令」을 듣기로 합시다. 
여러분더러「身勢打令」이란 도무지 格에 맞지 않는 말이외다마는, 가만있자 이말씀을 어떻게 물을까, 그러면 차레차레 몇가지물을려하는데 爲先 여러분의 지내온 經路부터 듣기로 합시다. 서울와서 오늘저녁 이 자리에 모이기까지 어디 一場說話를 좀 말씀하여주서요. 
南宮仙―아이, 큰일 났네. 새파란閣氏보고 八字타령을 하라니 이를 어떻게 해요?
文藝峰―글쎄 말이우. 큰일 났는데요. 오늘저녁은 三千里社에 단단히 부뜰렸군. 
李瑞求―자, 于先 나이 第一 어린분부터 始作합시다. 예서 第一나이 어린이가 누구실까?
崔貞熙―아마 仔細히는 몰라도 제보기엔 南海燕氏인것 같군요. 
南宮仙―그런데 나은 제발 묻지말아주세요. 年齡은 實로 우리에게 있어서 最大의 秘密이오 職業에도 그 利害關係가 미치니깐요. 
李瑞求―네, 그事實은 미리미리 알고있습니다. 그럼 어디 卜惠淑氏부터 이야기 하십시요. 
卜惠淑―내 過去는 나보다 남이더 잘아니까요. (笑) 제故鄕은 忠淸南道寶寧이며, 제 父親은 牧師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少女時節을 牧師의 딸로 敎會에도 熱心히 다녔고, 學校에도 熱心히 다녔습니다. 그때 小學校時節의 學課成績은 그리 훌륭하다고 할것은 없었으나 作文과 圖畵에는 相當한 素質을 가져 稱讚을 받았었어요. 그때부터도 小說을 읽기좋와 해서 小學校를 卒業하던때 何夢李相協氏의 飜譯인「海王星」에 미쳐서 그야말로 밤을 낮으로 熱讀했죠. 그後 열다섯살때 東京에 건너가서 技藝學校에서 二三年間 學業을 닦게되었었는데 어느때 帝國劇場에 求景간것이 나로하여금 오늘날 이八字를 만들어 놓고말았지요. 毋論 小學校時節에는 俳優라는것을 꿈에도 생각못했고, 그저 그때 기껏 理想한 希望이라야 將次 小學校의 敎師나 되였으면 하였죠. 그밖에 또다른 理想이 하나 있었다면 牧師의 家庭에서 자라나게 된 關係로 將次 米國이나 留學갔다 왔으면 하는것이었지요. 그러나 東京에 건너간後의 나의 理想은 달라젔어요. 將次 新聞記者가 아니면 俳優가 되려는 두가지의 希望을 가지게 되었어요. 
李瑞求―하하! 그러구보니 俳優의 所願은 이루웠는데 아직까지 新聞記者노릇을 못해봤으니 이제부터 어디 記者生活이나 한번 하여 보시죠. 
卜惠淑―인젠 아주 틀레마센데스나! 何如間 그때 제아버지께서 東京에 쫓아와서「아사구사」에서 나를 붓들어가지고 京城에 돌아왔으니깐요. 그리구 東京있을때 舍監先生이 너는 將次무엇이 되려느냐 묻기에 俳優가 되겠다고 對答했었는데 그後 제가 京城에서 公演할때 그 舍監先生이 大蓮에 무슨일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京城거리에서 포스타-를 보고 나를 찾아와서 너는 네所願대로 (漫畵는 文藝峯孃) 成功했구나 하고 말씀하시드군요. 그러니까 나는 俳優가 되구싶어서 된것이라 하겠지요. 
李瑞求―다음은 南宮仙氏가 말씀해 주십시요. 
南宮仙―제故鄕은 黃海道 信川이며, 제 本姓名은 金鎭順이얘요. 저도 小學校때부터 主日學校에 다녔기때문에 크리스마스때 禮拜堂에서 聖劇을 노는때마다 늘 出演해서 매우 稱讚을 받았습니다. 小學校를 卒業하고 開城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에서 二年間 通學하다가 京城梨花高女로 轉學을 했었지요. 물론 저는 이 俳優生活이 本來의 理想은 아니었어요. 그때의 제 理想은, 學課의 成績도 남만 못하지는 않었으며 더욱이 音樂에 素質이 있어서 將來의 目的을 音樂에다 두었지요. 그래서 梨花高女 二學年때부터 個人敎授까지 받았어요. 그리구 어떻게도 音樂에 미쳤던지 미순스쿨이니만치 日曜日이면 禮拜堂에 가야할것인데 늘빠저서 가만히 音樂室에 들어가 피아노를 치다가 先生에게 들켜서 꾸지람을 들은것이 한두번이 아니얘요. (그는 엷은 한숨을 짓고는)그러나 그렇게 渴望하던 音樂도 事情이 如意치 못해서 梨花高女를 卒業하면 渡東하려든 꿈이 깨트려지고, 咸德勳氏의 알선과, 그의 오빠 咸大勳氏의 紹介로 劇硏座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老役을 하게되었으며, 그後 春秋劇場에서 二三個月 일보게 되었고,「오디힐」이라는 李雲芳氏의 脚色인 演劇의 主役으로 나와 비로소 演技를 나타내게 되었어요. 그때가지도 저는 音樂에 對한 希望을 버리지 못했으며,劇界에 들어서게 된것도 레-코트에 노래를 吹入하려면 劇界에 들어서는 길이 가장 빠르다고 하여서였습니다. 그後, 저는 제所願을 이루게 되여 東京으로 건너가게 되엇으며, 東京서 高等音樂學校에 通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洪蘭坡氏의 알선도 많이 입었고요. 그리다가 그 이듬해 여름放學에 집으로 돌아나와서는 다시 東京으로 건너가지못하게 되었어요. 그뒤 東洋劇場 專屬이었던 靑春座에서 一年間 活躍했으며, 그 靑春座에서 分離되어 나간 中央舞台에서 비로소 理想에 맞는 演劇을 많이 했어요. 相對役은 대개 沈影氏와 徐月影氏가 많이 하였어요. 
李瑞求―「하이델베리히」의 主人公「케리」로 扮裝하고 나온이가 바로 南宮仙氏랍니다. 
朴啓周―아, 그래요? 난 그때 누구신줄 모르고 보았는데,「하이델베히」는 참 좋았어요. 
李瑞求―왜,「春姬」의「春姬」로도 扮裝하고 나왔지요. 다음은 文藝峯氏가 말씀해 주십시오. 
文藝峰―전 別로 말씀드릴게 없어요. 제 故鄕은 咸興이었으며, 아버지께서 本來 劇藝術에 몸을 바치셔서 일하셨기때문에 自然히 아버지를 따라서 저도 이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요. 열세살때부터 舞台에 나서기 始作했으며, 처음엔 咸興사투리가 나와서 퍽 困難했어요. 아버지께서 劇에 몸을 바치셔서 일하셨다고 제가 마지못해서 끌려간것이 아니라, 그리고 무슨 生活에 危脅를 받아서 들어선것도 아니고, 전 事實 이 藝術의 길이 좋아서 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李瑞求―事實, 이 座席中에서는 文藝峯氏만치 俳優의 길을 順調롭게 걸으신분이 없을것이며, 劇이나 映畵藝術의 길에 있어서는 文氏는 名門의 出身者인 幸福者라 할수 있지요. 아버지도 理解가 계셨고, 現在 男便되시는 林仙圭氏는 劇作家니까 또한 理解가 있어서 그야말로 坦坦大路를 걸어온셈이지요. 다음은 金鮮英氏가 말씀해 주서요. 
金鮮英―제 故鄕은 平北定州얘요. 學校는 京城女子商業學校를 나왔으며, 工夫를 더 하지못하게 되어서 화낌에 집에 들어배켜서「玉淚夢」四卷을 十日間 讀破했지요. 그때 참 滋味있게 읽었어요. 그리고 처음 第一劇場에서 公演한 羅雲奎氏와 李白水氏랑 關係하든「언덕을 오르는사람」이라는 劇에 令孃으로 處女出演하게 되었는데 沈影氏가「가다고이」하는 場面이 있었지요. 그리고 今方 女學校를 나온때라 언제「하이힐」을 씬어본 經驗이 없어서 하이힐을 신고 舞台에 만들어논 언덕을 나려오다가 그만 넘어졌지요. 아, 그래놨으니 챙피막심하고 꼴이 망칙하게되어서 일어두 서지못한채 벌벌 기어서 舞台뒤로 달아나 버렸지요. (一同笑) 아이, 그때 어떻게도 부끄러웠던지, 何如間 첫公演은 失敗였어요. 그리고 그後 東洋劇場 專屬인 靑春座에서 俳優의 生活을 하다가 昨年에 結婚하고는 別로 舞台에 나서지못했어요. 
朴啓周―結婚하신뒤에 한번도 舞台에 나서지 못했어요?
金鮮英―昨年가을에 東洋劇場에서「犠牲」이라는 劇을 公演하는때 꼭한번 出演하게되었는데 偲家에서 絶對 反對하시기 때문에 밤이면 本家로 놀러간다고 속이고, 나와서는 東洋劇場으로 달려가서 舞台에 서게 되었지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五日間이나 繼續하는데 每日 本家로 간다고 속이게 되니 왜 綻露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제가 아는 觀客中에서도 제가 舞台에 나선것을 發見했으니 말이 안날理가 있겠어요. 그래서 偲家에서 알고는 反對가 빗발치듯 쏟아지기 始作했는데 참 혼났어요. 그러니 제가 舞台에 나서지않으면 안될形便이고, 그리고 시아버님께서 완고하신便이어서「네가 시아버지를 두고 그런곳에 나가서 딴사내들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이럴法이 天下에 어디 있겠느냐고, 해괴망칙한 일이라」고 펄펄 뛰다시피 하시니 참 그때 困難했어요. 그뒤로는 아직까지 舞台에 나선일이 없었어요. 
李瑞求―「犧牲」을 公演하시다가 정말 偲家에서 犧牲을 當할번 했군요. (一同笑)
崔貞熙―다시 舞台에 나서구 싶은 생각은 없어요?
金鮮英―왜요. 꼭 한번 나서서 제마음에 맞는 劇을 하구싶어요. 
李瑞求―다음은 南海燕氏가 말씀 들려주서요. 
南海燕―전 정말 할말이 없어요 제故鄕은 忠南天安이며, 저두 京城女子商業學校를 나왔슴니다. 그리고 제 本姓名은 李貴來얘요. 그後 東京에 건너가서 푸로劇場에 關係해서 四五年 지났으며, 京城에 돌아와서는 新建設劇團에서「西部戰線에異狀없다」는 劇에 主演했어요. 

처음나선舞臺와 그때의年齡

朴啓周―舞台에 처음 나서시던 때의 여러분의 年齡과, 또 처음 나서신 舞台는 어느 舞台였는지 들려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文藝峰―저는 열세살때부터 舞台에 나섰지만, 그때는 小兒役이었었고, 主役으로 나서기는 十五歲時었는데, 男子役을 하게되었어요. 舞台는 水原劇場이었나봐요. 
南宮仙―저는 처음 舞台에 나서기는 스무살때었으며, 舞台는 東洋劇場이었어요. 
金鮮英―전 十七歲時에 처음 舞台에 나섰으며, 그때의 舞台는京城第一劇場이었어요. 
南海燕―제가 처음 舞台에 나서서 本格的인 公演을 해보기는 二十歲時였으며, 舞台는 京城劇場이였읍니다. 
朴啓周―다음 卜惠淑氏께서 말씀하서요. 
卜惠淑―아이휴! 전 가마아득해서 몇살에 舞台에 나섰는지, 어느 劇場이었는지 통 알수없군요. 처음 關係한 劇團은 土月會였구요, 아마 十七八歲때 처음 舞台에 나선듯 합니다. 

旅行中의 로맨스

李瑞求―자, 이번에는 旅行中에서 얻은 로맨스나 들려주서요. 
南宮仙―旅行中에 무슨 로맨스가 있어야죠. 
李瑞求―아, 이러지 마시구 어서 旅行中에서 얻으신 달큼한 로맨스나 感激이나, 逢變이나 아무것이든지 좋와요. 
卜惠淑―逢變한 일이라면 제가 한마디 이야기 하겠습니다. 옛날尹白南氏가 關係한 民衆劇團이 地方公演을 할때였었는데 馬山에 가서 演劇을 하기는 했는데, 收入보다 支出이 많아서 그만 빗을젔구려. 旅舘食費도 支佛하지못해서 旅舘主人의 一大호통下에 戰爭이 展開되었는데 그러니 빗을 진놈이 뽐내는수야 있습니까. 하는수없이, 演劇쟁이親舊들이 나를 그 旅舘에 에 典當잡고 京城가서 돈을 보낸다구 하구는 하나둘 뿔뿔이 빠저서 다 달아났구려. 하루가 지나고 一週日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되어도 어디 돈이 와야지요. 旅舘房에 가쳐서 속에서 불은 일어나고, 견딜수가 없어서 便紙질과 電報치기를 無慮 七八十圓어치 했죠. 그래도 웬일인지 돈은커녕 回答한장도 없이 아주 그야말로 꿩구어먹은 자리와 같이 消息이 깡감하구려. 그러니 내속이 오죽탔겠어요. 돈이 정 아니오면 그때만 할지라도 술집이나 遊廓에 팔아먹는때니까 더욱 焦燥했는데, 旅舘主人은 典當品인 내가 다라날까봐 房에 가두어주다시피 하였으니 이를 어쩝니까. 두달이 돼도 消息이 없구려. 너무두 속이 타고 불이 일어나서, 그리구, 밖알世上이 보구싶어서 밤이면 남이 자는동안 가만히 일어나 밖에 뛰여나가서 신도 못신고, 신을 신노라면 잽힐것 같애서 맨발로 馬山거리와 골목을 날이 밝도록 해매이었지요. 그러구 보니 馬山거리에서는 밤에 미친년이 헤매인다고 消聞이 자자하게 퍼지게 되었고, 하루밤에는 그만 들켜서 主人에게 부뜰려 들어와 結縛을 當하게 됐지요. 그러니 더욱 속이 타고 원통해서 악을악을 스면 정말 내가 미쳤다고 무당을 불러드리고, 굿을 하며, 조밥을 지어서 내얼굴과 내몸에 막끼얹고, 복숭아뭉치로 때리면 鬼神이 나간다구 하면서 막 때리는구려. 이런 기맥힌 노릇이 있습니까. 그래서 더욱 악을 쓰며 高喊을 지르니까 아직 鬼神이 떨어지지 않아서 이런다고 하면서 더욱 때리드군요. 악을 쓰면 더욱 맞겠기에 하는수 없이 마지막엔 가만히 있었더니 복숭아 뭉치로 때리던 무당이 이제는 鬼神이 나갔다고 하면서 때리던것을 끊지드군요. 온, 참, 기가 맥혀서……三個月만에야 요행 馬山에서 놓여났구려. (一同笑)
文藝峰―저는 十六歲때, 劇團에 따라다닐때었는데 아버지의 親舊인 三十八九歲되는 某氏가 異狀하게 親切히 굴어요. 그저, 아버지의 親舊니까 나를 조카와같이 貴해하거니 했죠. 그런데 어린마음에도 그 사람이 저를 對하는 態度가 너무도 이상하고 추군추군하기에 그때부터는 精神을 바싹 채리고 저도 對했지요. 그러니 아버지와는 親한 사이요, 利害關係도 있으니 말할수도 없구요. 그랬는데 그분이 마지막엔 나와 約婚까지하였다고 巷間에 消聞을 퍼트려놓아서 實로 딱하고 억울하고 분해서 건딜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우리는 꾹 참고 있었죠. 참 世上에는 別일두 다 있드군요. 
南宮仙―저도 서울에 있을때 어떤 專門學校學生으로부터 戀書를 繼續해서 연달아 받게되었는데 한번도 回答을 하지않았지요. 그때는 제게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기때문에 영 應하지 않았더니 한번은 어느料理店에서 期於히 꼭만나자고 해요. 너무도 懇請했기에 갔더니 그분이 정말 眞情으로 哀願하면서 당신을 爲해선 모든 願도 다 들어드릴터이며, 生活도 安定시켜주고, 또 먼저 約婚만 해주신다면 당신의 舞臺生活을 위해서 당신이 願하는 때까지 結婚도 하지않고 기다릴터이라고 하면서 懇願하나 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때문에 應할수가 없다고 拒絶했지요. 아 그랬더니 그後에 그가 惡宣傳을 하기始作하는데, 나는 南宮仙이와 사랑하는 사이느니, 約婚을 했느니하고 消聞을 퍼트리기 始作해서 저는 제愛人에게 誤解를 받고 참 말할수 없는 딱한 境遇에 逢着했댔지요. 
그리구, 이건 참 우스운 넌센스劇인데, 한번은 또 누구에게서 懇切한 戀書가 자꾸 와요. 그러다가 한번은 血書까지 보냈는데 처음에는 그 血書를 보구 깜짝 놀랐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게 사람의 피로 쓴게 아니라 빈대피로 썼드군요. 호호호호, 아니, 참 우스워서 죽을뻔했어요. (一同笑)
卜惠淑―아아니, 그러니 빈대를 몇마리를 잡아서 피를 내야 편지를 다 쓰겠어요? 거 굉장히 빈대를 잡아서 貿易했든게로군 그래. (一同笑)
南宮仙―便紙全部를 어떻게 다 피로 썼겠어요. 그 主要한 크라이막쓰 한대목을 피로 썼는데 성냥가지에 빈대피를 묻쳐서 쓴것이 分明해요. 아무리 檢視해야 사람의 피가 아니고 빈대피는 틀림없는 빈대피든데요. (一同笑)
李瑞求―피는 빈대피래도 血書는 亦是 틀림없는 血書니까, 거 南宮仙氏는 大端히 幸福者인데요. 남이 받지못하는 血書까지 받았으니……. (一同笑)
南宮仙―아이! 히야까시 마세요. 
卜惠淑―血書를 받는것은 도리어 情떨어진다구 그러드군. 
南宮仙―글쎄 血書를 받으면, 붙으려든 情도 떨어지는지는 몰러도, 그런 사람은 도리어 믿을수가 없어요. 마치 보루루 끓다가식어버리는 쟁개비의 熱情같애서……. 
金鮮英―정말 그래요. 그런 사람의 사랑이 오래 가리라고는 도저이 믿어지질 않아요. 저도 血書를 봤는데 끔찍하드군요!
李瑞求―그래, 鮮英氏도 血書를 받은 일이 있어요?
金鮮英―아뇨. 제가 받은것이 아니라 東洋劇場 金東圭氏에게 온걸 봤는데……. 
李瑞求―원, 난, 또, 自己가 받은게라구. (一同笑)
金鮮英―그건 정말 사람의 핀데 俳優를 시켜달라는 志願書얘요. 참. 그 血書를 보니 가슴이 두군거리기까지 해요. 

親切한곳 · 不親切한곳

朴啓周―그런데 地方을 巡廻하시면서 보면 어느地方이 第一 親切하고 어디가 第一 冷情합디까. 
卜惠淑―옛날이야 다 親切했지요 地方으로 가면 歡迎이 相當했고 甚至於 時代日報當時 大邱에를갔을때에는 停車場에서 歡迎炮까지 터트리고 야단법석이었죠. 지금이야 어디 地方에 갔다고 歡迎炮는커녕 歡迎會조차도 別로 볼수없으니까요. 지금이나 옛날이나 무섭기로는 咸鏡道사람들인데, 淸津에서 第一 혼났어요. 옛날淸津서「籠中鳥」를 公演할땐데 舞台準備때문에 幕間이 좀 길어지니깐 幕間마다 날더러 나와서 딴스를 하라는군요. 그러니 비녀를 쪽지고 꼬리치마를 입었는데 그꼴을 해가지고 어떻게 西洋춤을 춰요? 이야말로 정말 요절할노릇이 아니면 氣絶할 노릇이라 레벨이 낮은人間들은 할수없구나 하고 自嘆하는데 자꾸 나와 딴스를 하라고 拍手는 波濤같이 場內를 울리는통에 監督李경환氏까지도 딱해서 날더러 어서 나가서 춤을 추라고 하는군요. 監督까지 이렇게 理解가 없으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監督더러「여보! 당신 精神있소? 없소? 이꼴하구 어델 나가서 西洋춤 추라는거요?」하고 한바탕 대들고는 忿낌에 舞台에 뛰어나가서「여러분 大體 당신들이 精神있소? 없소? 다음幕에 나와서 演劇해야할 이扮裝으로써 어떻게 딴슨지 西洋춤인질 한걸 춰요? 無識해도 분수가 있지, 머리 쪽지고 꼬리치마에 딴스가 무슨놈의 빌어먹다가 뒤어질 딴스요?」하고 악을 썼더니 演劇이 끝난뒤에 卜惠淑 이년을 잡아라 하고 벌이떼같이 덤벼드는통에 신도 못신고 旅舘으로 쫓겨다라나는데, 정말 똥을 쌀뻔했죠. (一同笑) 아, 그리구 한번을 間島龍井에 가서 演劇을 노는데「야, 이놈들아, 戀愛劇만 하지말고 社會劇을 해라!」하고 야질을 빗발 날리듯 퍼부으며―그때만 해도 社會主義全盛時代였으니깐요―演劇이 끝났을때 學生들이 우루루 달려들며 卜惠淑氏와 人事할테니 내여놓으라 하는구료. 나는 또 얻어맞게되나부다 하고 맨발로 또 旅舘으로 뛰어갔는데 學生무리가 旅舘에까지 쫓아와서 뜰악에 가득찼었는데, 數百名이 되는것 같애요. 어서 人事만 할테니 卜惠淑이를 내어놓으라고 督促을 하는통에 監督도 할수없이 날더러 나가보라고 하드군요.「에라! 모르겠다. 맞아죽을셈치고 어디 나가보자.」하고 房門을 열고 쓱 나섰더니 뜰악하나에 가든찬 學生무리를 보니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두군거려요. 그러나 담대히「웨 그러십니까?」하고 물었더니 學生한名이 쓱 나서면서 「웨 人事하자는데 이렇게 숨어 돌아가는거요」하고 묻기에「이 많은 學生을 내가 어떻게 一一히 人事하느냐?」고 對答했죠. 그랬더니「一一히 人事하는게 아니라 代表한사람이 人事하는게라」고 하면서 손을 턱 내어 밀면서 握手를 請하더군요. 그래서 나두 아주 가장 담대히 손을 턱내어밀어 握手했지요. 그랬더니 그분들이 됐다고 하면서 모두 돌아가요. 그제야 저는 한숨을 휘우 내어쉬고 이마의 땀을 씼었지요. 비록 戀愛劇을 했다고 辱은 했을망정 멀리 異國에까지 찾아온 同胞라고 感激의 人事를 할려고 온것을 모르고 그렇게 혼이 났댔군요. 아이, 그때는 웬代表가 그리 많은지! 쩍하면 무슨 代表니 무슨 代表니 하고 꽤들 떠들었지요. 
金鮮英―저는 地方巡廻를 하여보던中에서 釜山이 第一 親切하드군요. 우리가 釜山가면 꼭 留宿하는 一定한 旅舘이 있는데 그집主人老人이 참 親切해요. 우리가 새벽에 車에서 내려서 들어가거나 或은 추운 때 밤에 늦게 들어가도「아, 우리 아씨들이 또 오셨군. 어서 아랫房으로 들어오라」하면서 불을 뜨겁게 짚여주는等, 밥이 미처 되기前에도 우리가 추워할까봐 미역국을 미리 끓여서 드려오며 야단법석이지요 그 令監이 똑 佛蘭西俳優 아리볼氏처럼 생겼기에 우리가 아리볼令監이라고 불렀지요. 
文藝峰―海州,信川,大邱,咸興等地가 다 親切하드군요. 한번 혼나보기는 王平氏랑 가치 普州에 가서「사랑의 合理化」라는 劇을 公演하다가 警察에 모두 붓들려가서 꽤 苦生했지요. 
南宮仙―(핸드백에서 거울을 거내어 化粧을 하다가)집에서 올때는 내가 第一 이쁘려니 생각했더니 지금 거울을 드려다보니 내가 第一 못생겼군그래. (笑)

巷間의「꼬싶」에對한抗議

李瑞求―이번에는 世上에서 여러분을 向하여 여러말이 있는 꼬싶에 對하여 抗議, 或은 辯明, 그 眞相等을 말씀해주시오. 
卜惠淑―저는 멀 요새 꼬싶에 오르내릴 아무 껀데기도 없으니깐요. 
李瑞求―卜惠淑氏가 仁寺町에서 移舍하여가니까 仁寺町골목안이 大端히 조용해졌다고 말이 많던데요. 그리고 淸進町으로 移舍가신 뒤에는 淸進町町會에서 요란하고 奔走하다고 追放命令이 내리지 않습디까. (一同笑)
卜惠淑―네, 仁寺町에서 내가 떠난것이 매우 시원섭섭하다고 지난 年末에 繕物도 꽤 많이 쓸어들던데요. (笑)
文藝峰―전 요새 이런 꼬싶에 오르내리는 모양인데, 그것은 某映畵社에서「處女圖」라는 映畵를 撮影할텐데 절더러女主人公으로 出演하여달라고 某監督이 付託하드군요. 그분이 처음 절더러 말씀할때에는 그리 어렵지도 않은듯이 말하고, 또 제가 맡기에 摘當하다고 하며, 쉬운것같이 말하더니,「處女圖」의 內容을 記錄한 冊을 가저다 보니까 여간 어려운것이 아니얘요. 그리고 저로서는 도저히 맡을수가 없는것이기에 못하겠다고 謝絶했더니 건방지다고 非難이 많은 모양이얘요. 저는 事實 뽐내느라고 못하겠다고 한것이 아니고, 저로서도 도저히 맡을수가 없는 어려운것이오, 따라서 제 演技로서는 그映畵를 映畵로서 살리지 못하겠기에 그 映畵自體를 爲해서 謙遜한 意味에서 사양한것인데 그분들이 誤解하고 文藝峯이는 지금은 아주 뽐내고, 大端히 건방지게 군다고 批評하니 참 억울해요. 

내가感銘받은小說

朴啓周―여러분이 읽으신 小說中에서 第一 感銘깊은 小說을 하나씩 들어주십시요. 
南海燕―저는 李箕永氏의「故鄕」을 感銘깊게 읽었어요. 
卜惠淑―「故鄕」말이 났으니 말이지, 우리는「故鄕」을 脚色한것을 公演하려고 猛練習까지 했다가 못하게 되었고, 또 우리 故鄕땅인 忠淸道가 舞台이기때문에 印象이 깊어요. 
文藝峰―저는 李泰俊氏의「第二의運命」을 感銘깊게 읽었는데 特히 男主人公이 印象깊게 남아있어요. 그리고 요새 와서는 李光洙氏의「사랑」을 참 感激히 읽었어요. 
金鮮英―저는 近者에 와서 李光洙氏의「無明」을 第一 感銘깊게 읽었어요. 
南宮仙―저는 別로 朝鮮作品을 읽지는 않습니다. 或, 요새 읽은中에서 좋은것이 잇었다면 方仁根氏의「歸鄕」이얘요.「歸鄕」은 참 좋더군요. 그런데 谷崎潤一郞氏의作品中에 이런 內容의 作品이 있는데 그것은 아주 世界的으로 名聲을 드날리는 偉大한 畵家가 있어요. 그가 큰 罪를 犯하고 監獄으로 가게됩니다. 그가 監獄으로 가며 하는말이「내藝術은 나와 함께 監獄으로 간다」했으니 그것을 어떻게 解釋해야 좋을까요? 社會는 그의 犯罪와 함께 그의 藝術까지 埋葬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의 犯罪는 犯罪로 돌리고 藝術은 藝術로 그냥 認定해 줘야할까요?
李瑞求―그것은 各個人에 따라 解釋이 다를테죠. 
文藝峰―無論 犯罪는 犯罪고, 藝術은 藝術이지요. 
卜惠淑―저는 요새, 읽은 小說은 없고, 읽는 小說은 있습니다. 그것은 朝鮮日報에 連載中인 李箕永氏의「大地의아들」이얘요. 

이우에 더 바라는幸福

崔貞熙―여러분은 지금의 俳優生活을 幸福되다고 생각하십니까. 
文藝峰―네, 저는 幸福되다고 생각해요. 
南宮仙―저는 不幸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滿足은 없어요. 生活의 危脅을 받아서 劇을 하게되니깐요. 처음에 劇團에 들어설때도 밥을 위해서 들어섰고 지금도 밥을 위해서 하는 몸이며, 이것은 나만 아니라 大槪가 다 그렇지요. 
文藝峰―밥을 위해서 劇을 하신다면 그것은 藝術을 道具化하는 일이 아니겠어요?
南宮仙―그것은 理論이고 實際에 있어서는 먹기위해서 演劇을 하는이가 太半이니까요. 社會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것을 藝術을 道具化시킨다고 구태여 나무랠것도 없지요. 
朴啓周―萬一 現在의 俳優生活이 幸福되시다면 이우에 더 바라시는 幸福은 없으십니까. 
文藝峰―있어요. 그것은 제가 出演한 映畵의 作品이 그젯것보다 어젯것이 났고, 어젯것보다 오늘것이 났고, 오늘것보다 來日것이 났다고, 이렇게 자꾸 자꾸 제 演技가 進步되고 向上되어간다는 評을 듣게되도록 되기를 바랍니다. 그外에는 다른 幸福을 바라지 않습니다. 
李瑞求―그것이 藝術家의 참된 告白일줄 압니다. 
金鮮英―저두 亦是 제 演技가 나아지기를 바래요. 
南海燕―그야 누구나 다 바라는 共通된希望이겠죠. 그리고 그렇게 되어간다면 幸福이 아닐수 없지요. 
朴啓周―自己의 藝術을 위해서 自己몸을 犧牲하는 일은 없어요? 다시 말하면 地方에서 公演하다가 빗을 지고 여러사람이 苦痛을 當하는것을 보고 自己몸을 犧牲시키는 일, 露骨的으로 말하면 貞操를 파는일까지 없는지요?
卜惠淑―웨 없어요. 그前에는 그런 現象이 더러 있었지요. 그리고 女子를 旅舘에 典當잡고 가서는 돈을 보내지 않기때문에 그女子가 나종에는 카페나 술집에 몸을 팔게되는일이 종종 있었답니다. 

長安에서부러운家庭

李瑞求―여러분이 長安에서 名士의 家庭으로 부러운 家庭이 있다면 누구누구의 家庭입니까. 
南海燕―글쎄요. 名士의 家庭으로 아는 家庭이 있어야죠. 
南宮仙―저 亦是 그래요. 
金鮮英―저두 名士의 家庭을 그리 잘 아는집이 흖지 못하며, 동무의 家庭으로는 여기 계신文藝峯氏의 家庭이 재미나다고 봅니다. 
南宮仙―저亦是 부러운것은 아니나 安基永氏家庭이얘요. 
文藝峰―저는 柳致眞氏家庭이 第一 재미나다고 보아요. 

肉體가늙어가는데對한感懷

朴啓周―마지막으로, 靑春이 가는것같은 슬픈 感懷가 없으신지요. 피었던꽃이 저가는 그 슬픔과 쓰다림이, 哀愁라할까요, 肉體에 가을이 오는데 對해서요……
文藝峰―저는 어쩐지 나은 먹어도 마음에는 늘 어린것같이 생각돼요. 
南宮仙―전, 나이를 자꾸 먹게되어서 늙어가는것이 怨痛해요. 늘 젊어지기를 바랍니다. 
卜惠淑―저는 어서 速히 늙어지기를 바랍니다. 還甲잔치도 어서 먹어야겠고, 또 늙어야 老役같은것을 할때 化粧하지도않고 俳優노릇을 하게되겠으니까요. 化粧값도 들지않고 오죽 좋겠어요. (一同笑)
金鮮英―저는 시어머님의 膝下에 있기때문에 食母를 마음대로 命令할수 없으므로 어서 늙어서 내 마음대로 勢도를 부리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食母들에게서 마나님소리를 듣구싶어요. (笑)
崔貞熙―肉體가 늙어감에 따라 무
(第一七○頁에續)
(第一四七頁에서繼續)
슨 걱정이 생기지는 않아요?
南宮仙―男便이 마음이 變할까봐 걱정돼요. 
卜惠淑―저亦是 男便의 마음이 變하지 않을까 그것만 念慮돼요. 
文藝峰―저는 아직까지 그런 걱정은 가저보지 못했어요. 
南海燕―저는 그저 아무 걱정도 하지않게 됐으면 第一 좋겠어요. 
卜惠淑―女子의 靑春은 너무나 짧은것 같애요. 
南宮仙―그래요. 三十이 넘으면 벌써 그만이니까요. 
李瑞求―女子는 그저 十八歲로부터 二十五歲까지가 가장 靑春의 葬麗한 時期니깐. 
崔貞瑞―여러가지 말씀을 많이 들려주서서 매우 고맙습니다. 밤도 깊어서 벌써 열두時가 되어가는데 이것을 閉會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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