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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춘향제 참별기―3만여명 군중이 모여 성대하게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남원 춘향제 참별기―3만여명 군중이 모여 성대하게 南原春香祭參別記―三萬餘名群衆이모여盛大하게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최옥희 崔玉禧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9-07 昭和十四年七月
면    수 14 (特輯)(14)
기사
[사진] 筆者 崔玉禧孃
學藝社特派員 崔 玉 禧

貞節女 春香을 追慕하는마음에서 湖南人士 玄俊鎬氏等의發意로畵伯 金殷鎬氏에게 春香의畵像을 改筆케했다는 이얘기는 우리가여러번 紙上에서 읽어알어온바입니다. 이윽고 金殷鎬畵伯으로부터 春香이가 完成되여 지난五月二十六日은 그入魂式을擧行하는 날이였읍니다.
때는 바야흐로 꽃피고 새우는 좋은時節! 또그날이 바로 초파일이었읍니다. 나는 學藝社發行인 城大講師 金台俊氏編案의 朝鮮文庫春香傳 原本 千部를 携帶하고 金台俊氏와 함께 二十五日밤車로 春香이를 誕生해준 南原을 向해 떠났읍니다. 故鄕이 南原서 멀지않은곳에있지만 나는 아직 南原을 본일이없었기때문에 車窓밖의 밤世上에눈 을보내고안저 꿈같이 로맨틱한 南原을 어둠속에 그리고있었읍니다 車도 달니고 내마음도 달었읍니다
우리가 탄車는太田裡里에서부터 밧삭사람이 오르기 시작했읍니다. 머무는곳마다 스물식 설흔씩 團體로떼를지어 車에 오르는데 모다 南原行이라했읍니다 車바곤을 멫個디달었다는데도 배잡아서 나종엔 사람을 짐車에까지 막 실어올니는 形便이었고 더 실을데가없어서 驛에서 乘車卷을 팔지않음으로 그들은 나종엔 그밤을 걸어서 四五十里길을 간다고했읍니다. 男子들뿐이라면 바람서늘하고 달뜬밤을 성큼성큼 긴다리로 걸어보는것이 더한층 春香이를 맛나러가는 李道令같은 맛이나서 좋을지모르나 별로 길을 걸어보지않든 여렴집婦女子들에겐 아모래도 苦役이아닐수없는것이였읍니다. 마는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괴롭다고생각지않는듯 했읍니다. 그만큼그들의머리엔「春香」이란 貞節女가깊이 색여진것이엿읍니다.
우리는 이튼날아츰 아홉時에 南原에到着했읍니다. 驛에 아모도 마중나온 사람이없어서 邑까지 한十里나되는길을 걸어들어가야하자면책이 큰짐이아닐수없었읍니다. 마츰 어느집自家用인듯한 自動車가있어서 그다지 苦生은 없었으나 누가 한사람쯤은 마저주어도 좋을상싶은 마음이였읍니다. 車가 廣寒樓앞에 다어도 아모도 갓가히와주는이 없었읍니다. 거저 數萬名되는 群衆이 와글와글 廣寒樓門前에서서 門열니기을 顧待할뿐이였읍니다.
우리는 車에서 책을 부리우고 金台俊氏는 우리보다 먼저 가있는 朝鮮映畵株式會社 뉴―쓰撮影班의 李載明氏라도 맛나야하겠다고 그분을 찾기로하고 나는 책을 내려논곳에 멍하니 서서 廣寒樓를 처다보며 五百年前 부채를 펴들고 詩를 읊든 李夢龍의 좋은 모습을 눈앞에 그리기도하고 또數없이 느레선 굵은느티나무에 매여놓은 근네에 春香의아름다운 姿態를 생각해보기도했읍니다 못박을틈도없이 디리밀여서 물끌틋 끌어번지는 사람들속에서도 나는 조용히 李夢龍과春香을 생각할수있는것이 즐거웠읍니다.
오랜後에 金台俊氏가 李載明氏를 겨우맛난모양으로 두분은내가 서있는곳에 왔읍니다. 서늘한 바람부는 아츰日氣여서 도모지 땀흘닐때가 아닌데도 두분은밀니고 밀고하느라고 땀을 철철 흘니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나도 그분들과같이 땀을 흘니고야 廣寒樓안에 들어갈것을 생각하니 끔직스러웠읍니다. 마는 내친 거름이라 들어가는 수박게없었는데 정말難關의難關을 突破했읍니다.
우리一行이 廣寒樓안으로 드러가느라고 門이열니게되자 門앞에몰여든 群衆이 모다 제각금 앞을 다토아 門안에 들어가려는것이었읍니다. 監督하는 사람이 아모리 소리를 질너도 그들은 드른체도하지않고 앞으로 앞으로밀니기만했읍니다. 나종엔 監督하는 사람도하는수없었든지 크다란 몽뎅이를 들고와서 세넷이 닥치는대로 뒤들겨주는것인데 뒤들겨도 그들은 얼는 避하지않는 모양이였읍니다. 엇쨋든 數없는매가 그들몸에 앞었을때 그들은 엎어지며 잡바지며 門前에서 避하는것이였읍니다. 그제야 우리一行은무슨 凱旋將軍모양으로 그들이 빗긴길을 걸어서 廣寒樓안에 들어갔읍니다. 하나 마음은 그리愉快한것이 못되였읍니다. 밤을 새우며몰여온 그들, 그중에도 四五十里길을 걸어서온 그들, 春香을보려고 맻일씩 잠을 안자고 압일을 당기여하고온 골몰한그들, 자기네게있는 모든것中에 가장 좋은것을입고 좋은 신발을 신고온 그들, 그들은 확실히 自己네마을을떠날땐 서울로 과거보려가는사람인양 서슬이 퍼러했을것입니다 門직이 監督들 매가 自己네들몸에 앞을줄은 도모지 豫想하지않었입니다.
入魂式은 午前十一時半에 擧行되였읍니다. 貴賓여러사람과 또그곳 有志들이 廣寒樓上에 着席한後에 門은 열니였읍니다. 門이열니자 門밖에 뫃여섰든群衆은 그야말로湖水같이 쏴밀여드는것이아니겠읍니까 좀더 천천히 드러와도 좋을것을 그들은 업퍼지며잡바지며 붓그런것 꺼리끼는것없이 廣寒樓안에만 들어스면 그만이라는 생각인듯했읍니다.
式은 광대들이 퉁소불고 젯대부는데서부터 始作되였읍니다. 다음으로는 春香의 肖像 은것과 새것을 보교에 담어서 春香祠로부터 廣寒樓에 모서오는데 한보교에 한개씩 담어서 기생들이 메고오는 것이엿읍니다 기생들은 남치마에 힌저고리를입고 검정비녀를 찔는것이 꼭 옛날에도라간맛이였읍니다. 古色이 蒼然한 廣寒樓가 背景이였든까닭에 더욱 그러케 느껴젔을지 모름니다.
祭床은 普通것이나 마찬가지로 채렸읍니다. 오히려 빈약했을지도 모름니다 그래도 春香아가씨는옛날이나 마찬가지로 말없이 香의 냄새가 고요히향그러운 祭床을고맙게받고안젔는것이었읍니다. 祭床의 香이피어가고 누구누구의 祝辭가 게속되여갈때 나는 문득 香煙속에 微笑하는 春香을 볼수있었읍니다. 아마 春香은 自己의魂을곱게 살여준 此堂金殷鎬畵伯과 또 그박게 自己를 그처럼 追慕해주는이들 이몹시고마웠든 모양입니다 朝映撮影班은 때를 노치지않느라고 분주히 活動하고 있었읍니다. 廣寒樓아래서 우에서 엎에서 오루 세루 가루로 카메라맨은 카메라를들고 땀을 철철흘니는 程度였고 放送局에서가신 李惠求氏는 中繼放送으로 분망했읍니다. 마는 나는 오직 香煙속에 곱게 피여나는 春香이를 보는것으로 餘念이없었읍니다. 式이끝난후 旅舘에도라와서 點心을 먹고 한심쉬고나서 나는다시 廣寒樓안을 求景하고 金台俊氏는 自動車를 貸切해가지고 春香傳에 關한 材料蒐集하러 떠났읍니다. 밤에는 數없이만흔燈을 廣寒樓안에 색거에 매여달어놓은것을 구경했읍이다 一帶가 물天地인데 그물에燈불이 비치는양은 정말 仙境을생각케했읍니다. 二十七八日 이틀을 더繼續하여 씨름大會 鞦韆大會를 한다고했으나 우리는 일이 많은 까닭에 더 묵지못하고 곳 歸路에 올났읍니다.
드른즉 隣邑各處로부터 모여든 春香祭에 參席한 群衆이 三萬名을 넘었다한니 넷날의 烈女가얼마나 時代 靑春士女의 영혼을잡아 흔드는지 진실로 春香은 꺼지지안는 純情의 불길을 안은이겨레의 푸리마돈나요 萬人의 베아드릿치임을 새삼스러히 늣겻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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