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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정』의 밤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영화 『무정』의 밤 映畵『無情』의밤
종    류 좌담 座談
필    자 김동환․김동인․이헌구․이무영․백철․최정희․문예봉․한은진․안석주․박기채․이규환․김정혁 金東煥․金東仁․李軒求․李無影․白鐵․崔貞熙․文藝峰․韓銀珍․安碩柱․朴基采․李圭煥․金正革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9-07 昭和十四年七月
면    수 124 (124)
기사
映畵『無情』의밤
春園原作 · 朴基采監督

文士側 金東仁
李軒求
李無影
白 鐵
崔貞熙
俳優側 文藝峰
韓銀珍
監督側 安碩柱
朴基采
李圭煥
金正革

○日時 四月十八日
◇場所서울武橋다리께雅郞宙에서

金東煥(本社)-오늘저녁 바로 市內黃金座에서 映畵「無情」이 上映되어 滿都士女의 人氣를 끄을고 있슴니다. 이때에 우리들은『無情의밤』을 여러서 永遠히 藝術上尊貴한 이作品에對하야 이칠수없는 아름다운 記憶을삼고저함니다.
몬저 말슴할것은 春園께서 이 자리에 꼭나오시기로 되었든데았가 午後부터 身熱이甚해서 그만缺席하섰슴니다 遺憾임니다 만은 그代身 이作品을 監督한 朴基采氏에게보내는 書翰一札이入手되섰기에 이아래公開함니다.

主演俳優의 苦心談

자 이만치 하고……
몬저 主演하신 韓銀珍氏께서 苦心하든 말슴이나 들려주시구려「無情」을 몃번이나읽으섰서요.
韓銀珍-四五年前 學校다닐절에한번읽었고 그리고 이번 朴英采의 配役을맛게되자 또한번精讀하였어요.
記者-出演하실적에 英采의 정신이 어데있섯다고 보섰고 그래서 그의 表現에 애쓰섰서오?
韓-글세요「烈女는不更二夫」라는 그「아버지」의 말슴이 아니었을넌지요 女子에겐 純潔이몹시소중하고 또 그순결을직히기위해선두번지아비를 밧구지말난그말슴이 아니었을가요 저는 그렇게보고 그情神을 말과 行動우에 高潮하느라고 애썻서요.
記者-文藝峰氏는 어떠케 보섰서요.
文藝峰-「無情」全篇이야 바야흐로 깨려하는 黎明期의 그때時代의 압흠과 덧없음을 그리려하섰겠으나 저亦是 英采되여생각하면 小學에있는「烈女는不更二夫」란 정신이기둥이되여서야 올타고생각함니다.
그렇게 뼈에사모치게 알아오든信條가 그만 여러가지마지 못할사정으로 직혀지지못하게 될때 그래서 어릴때 아버지가써주시든 그글구쓴 白紙를 라스트씬에 가서 눈물흘니면서 강물에 떠내려보낼때 가장 거기가크라이막쓰라고 보아요.
記者-「無情」을 몇번이나 보섰서요.
文-예전 劇團에 다닐적에 보았는데 다시 한번 原作을보고싶어요
記者-韓銀珍氏 演技를 어떠캐보서요 만일 文藝峰氏가 朴英采役을 마텃더라면저런대목은이렇게 表情하리라 또는 이런대목은 내였드면 저러케하리라하고 생각한 대목이 없어요?
文-그걸 어떠케 말슴해요 그러나 韓銀珍氏는 잘하섰다고 생각해요 舞臺에 만히올나섰드니만치 퍽그나 능난하고 조타고보아요. 호호호
記者-演技를 하여가면서 정말내가「朴英采구나」하고 그렇게 흥분한적이잇서오.
韓-그作品을 박이는동안「박영채」의 기분을 갓느라고 퍽으나애썼서오.
記者-演技로가 아니고 정말 感이極하여 우신적이있어요.
韓-네 桂月香언이의 屍體를 차저새벽에 大同江가를 헤매일때 그場面을 박는 로케―슌때에는 눈물이 저절로 흘넛고 또한번은 亨植이 善馨이와 結婚式하는 光景을 敎會堂門간에서 바라보든 그塲面을박힐때 정말 또한번 울었어오.
記者-英采役에는「妓生」으로 나오는 대목이 많은데 서울茶坊골이나 平壤 釵貫里의 妓家를 見學하신적이있어요.
韓-없어요 衣裳과 자태를 朴基采先生이 指示하는대로 하였을 뿐이예요 제가 무얼암니까.

文士, 映畵批評家의評

記者-春園께서는 어쩨서 小說題目을「無情」이라고 부처슬가요. 無情의 었든 대목에 그뜻이나타나있다고 보서요.
金東仁-先覺者가 늣기는 感情그것은 多分히슬픔과 孤獨의情을싸안게되니까요 그런대서 아마이時代의 先覺者群을 象徵한말갓하요
朴基采-나도 그렇게 보아요 無明에서 光明으로 한時代가크다라케 轉廻할적에 그齒車에 치어 많은 犧牲을내이게 되니까 그情景을 象徵한말갓해요
記者-假令 어떠케오?
朴-女子의 節介을 두고 新舊道德觀念의 衝突이 일적에 거기에悲劇이 이러나고
記者―또
朴-亨植을 通하여 그時代 인테리靑年이 늣겨지든 理想主義와 現實主義의 激突에서 이러나는 苦悶相등
記者-잘 알겠어요 이 자리에는李軒求氏같은 映畵批評家도게시고 金東仁 白鐵 李無影 崔貞熙氏가튼文人도게시 니 그러면이제부터本論에들어가映畵化된이「無情」을完膚없이 批評하여주서요.
金東仁-春園의 無情이아니고 朴基采氏의 無情이더군요(一同笑)
李軒求-어제저녁 試寫會席上에서도 春園께서 다보시고는 이것은 朴基采氏가 創作한無情이라고 하시더군요.
金東仁-나도 바로 았가 午後에 달려가보았는데 내에게 直感된 몃가지 缺點을든다면 첬재이이映畵化된 無情은 스토리의 一貫性을일었어요 萬若原作을 읽지않코는 이畵面에 비처지는事實만가지고는 이약이의 줄거리를 찻지못하겠어요
記者-또 둘재는
金東仁-둘재는 監督이 무엇을 表現하려 努力했는지 不分明하여도 即, 主題가 鮮明치못해요
記者-그리고
金東仁-또한가지 이것은 俳優의 罪인지 監督의罪인지는 몰라도 出演俳優의 演技가 나근나근한 맛이없이 모다 長承가치 뻣뻣하여요.
李無影-語義의 强弱의 差는있을넌지 모르나 나亦 東仁氏 批評과같은 생각을가지고 있어요 原作의 藝術味를 오히려살니지못하고 뭇지른듯한 대목도있었어요
記者-全體的인 構成에서부터 指摘하여주서요.
李無影-作品「無情」에는 가장 좋은대목이 세곳에있다고 보아요
記者-어떠케
李無影-첬재는 평양패성학교 학도들이 夕陽에 浮碧樓, 乙蜜臺를 너머가면서 노래부르든 그를 바타서 桂月香이 英采를꼭 껴않으며「얘 저속에 詩人이있구나 저속에 時人이 있구나」하고 저혼자슬퍼하며 애타하든 그場面과
둘재는 桂月香이 새벽에이러나 英采손까락에 제손에끼였든 반지를 끼여노코 江邊으로내다라自殺하든곳
셋재는 三浪津 洪水통에 서로 三角四角의 이모든 젊은이들이「愛憎」의念을 다있고서로았기고 서로 용서하며 音樂會를열고 노래부르든일 물론 이밖게도 몃몃군대 같은데목이있었겠으나 萬一映畵化한다면 빼여서는 않될제場面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朴基采氏는 무슨생각으로했는지 가장 重要한첫場面과 나종場面을 잘나버리고말었어요 그랬기에 았가 東仁氏말슴모양으로 映畵의 主題―무엇을 表現하려했는가하는 監督의 意圖가 鮮明치못하고 말었지요.
記者-崔貞熙氏는 어떠케 보서오
崔貞熙-저도 大體로는 그래요 春園先生이 이小說 쓰실때 어디에 力點을 두섰는지 모르지만 저가보기에는 李無影氏 말슴하는 場面이 다「ヤマ」얘요. 저도 저浿城學校 學徒들이
새벽비치 솟는다
천하만물이 춤춘다
나만혼자 이려나
슬푼노래 부르네
하고 浮碧樓우로 사라지든 그場面이 저獨逸名畵「하이델벨히」의 그大學生과 게티가놀든그場面같이 豪華찬란한 畵幅이벌여질줄 期待했더니 그는 그림자도 없어진것이섭섭했고 또 田園描寫의 極致라고할 黃州병욱의집참외밧이 全허빠젔고 또 三浪津停車場待合室이빠졌고 -詩와 로맨스와 自然이너무 만히 빠졌어요.
記者-그렇게 缺點만 말슴마시고 이번에는 原作以上으로 살닌좋은 點도말슴하여주서요. 좋은點이야 수두룩하지요. 첬재맨처음맨첬場面이 小女가 근네띄는것이나오는데 그것은 一幅의名畵얘요 조선의로켈칼라를 百파-센트 나타냈어요 그힌치마폭이 수양버드나무 우로번득이는光景 참으로 印象的이야요
白 鐵-그塲面이 全篇에서 가장 깨긋하고 조왔는데 그러나 또한 必要以上으로 멋없게도길어젓서요.
金東仁-그리고 原作에는 亨植과 英采의 少年時代를 겨우 두서너줄로 說明하여버렷는데 映畵는 거지반 이少年時代를 平面的으로 描寫하기에 尺數의三分二를 虛費했어요 亦是 少年時代는 簡潔하게 省略함이좋지않었을가요.
記者-李軒求氏께서 映畵批評家의 立塲으로 個個의評을 좀하여주서요 構成이라든지 人物의演技라든지 音樂効果라든지 背景衣裳모도다
李軒求-한마디로 말하면映畵「無情」은「淡淡한作品」이라 할밖게
記者-어째서요
李軒求-눈물과 한숨과 情怨으로 엉키어야할 이作品이 너무지나치게 고요하고 그늘이없고 그저 平面的으로 슬금슬금 이場面에서 저塲面으로 넘어가버린듯해요演出者는 너무 原作에「遠慮して」또 極度로 自己流로感情을壓縮하여버려서 觀客에게迫力을 느끼게못했어요.
記者-어느 俳優의 演技가 가장 成功했어요?
李軒求-亦是 申友善이로粉한 李白水氏일걸요 韓銀珍氏도 지나치게 淸楚하였고 亨植役을맡은 崔南鏞氏 金賢洙役의 金一海다그러 그러하였고 아마 가장산것은 桂月香을 맡은 玄舜英氏일걸요 새벽 大同江을向하여가는 그場面은 音樂의効果를 겸하여 가장 生動하였으나까요. 善馨이든 金信哉氏도 雅淡했고
金東仁-날더러 말하라면 韓銀珍氏表情은 너무구덧고 變化가없었고 또 李亨植의 苦悶하는인테리型을 맛기에는 崔南鏞氏는 너무明朗하였으며 學校 校師로는 지나치게사치꾼이였고
白 鐵-申友善은 浩蕩하고 파탈하야 揚曲曲생각하게 原作에는 되였는데 李白水氏는 風采또行動이 그런點 表現하기에는 不足했고요
또 처음 鞦韆場面이 조왔으나 추천 돈치기가 한데 마구뭉처나오고 또너무길어서 이러나는 感興를 半減시킨 遺憾이있었어요.
李軒求-그리고 내가 特히 느낀 것은 音樂이 조왔어요 大體로말하야 우리가 몇가지 缺點을 들기는하였으나 깨긋하고 아담한 文藝作品이 었어요 演出者의勞가 多하다고 생각함니다.

演出者의意圖

記者-귀에 압흐섰겠으나 나종까지 잘참고드러주섰군요(一同笑)
이제는 演出者이신 朴基采氏께서좀 말슴하여 주서요
朴君께서는 演出할때에 春園께와 密接한 連絡을 取하시며進行하섰어요?
朴基采-처음 생각에는 그렇게하리라작정하고도 그만아모 連絡도없이 내마음대로 製作하여버렸어요
記者-어떤 點에 가장 苦心하섰어요.
朴基采-「無情」이 우리 文壇에있어 最高作品중 하나이니 그藝術味를 傷치않으면서도 또다른 한편 이映畵가 朝鮮映畵株式會社의 創立紀念作品이야요 即會社에 興行上損害를 끼처서는 않될, 그러기 爲하여서는 通俗味를加味하지 않으면 않될이런핸디캡을 싸안고서만들어야할것이기때문에 藝術性과 通俗性의融和에對하여 내딴은 무척 苦心하느라하였어요.
記者-그러신 자최가보이더군요
朴基采-그러고 그다음은 로케-슌때에 不自由를많이 늣겼서요 로케-슌은 平壤시 三四次햇는데 아시다 싶이 平壤은 撮影上制限이 많은곳이 되여서요그래서 高臺에서 캐메라를 둘느지못하니 浮碧樓一帶가 生動하는 畵面이되여질수없었고 陵羅島에 接近키어려웠으니 그멋진 수양버들을 맘대로 取扱하지못했섯고. 그러기에 平面的인그水流를 되푸리하여작고 박일수밧게없었어요
또 엑스튜라를 써야하겠는데 例하면 맨처음근네와 널을뛰고 돈치기치는 場面박일적에 엑스튜라를 많이 썻는데이것은 모다 시골농군들과 아히들이라그表情을 시키는대로 하여주지않어요.
그럴수밖게 없는것이 活動寫眞이란 生後에 한번도 보지 못한 이친구들에게한번에 三十錢도 주고五十錢도 주어길가는것을 붓잡어다가 안치고백여냈으니깐요 하하하. (一同笑)
記者-그밧게 또
朴基采-필님갑이 잔뜩 빗사게 되어서 마음대로 필님을 쓸수없어요 그러기에 NG없는 撮影을하려니까 編輯할적에 材料를 마음대로 選擇收輯할수없었어요.
記者-檢閱에 캇트 當한데는 없었나요?
朴基采-없었어요 몹시 注意하였으니까.
記者-았가 여러분의 批評에 對하여 反駁을 좀하지구려. (一同笑)
朴다올흔말슴이야요 깁히귀를 기우려듯고 많이 어든바있어요. 그런데 내意見몇가지를 말슴한다면 制限된 尺數를가지고만들어야하였기때문에 참으로너허야할 塲面인줄알면서도 不得已割愛한곳이 여러곳이서요
崔貞熙氏께서 았가指摘하드시 黃州 병욱의집 田園風景과 三浪津의 水害救濟光景과 또 平壤浿城學校의 光景等等
나는 처음에 이無情은 上下二卷으로만들작정을했어요 그래서처음에少年時代의 描寫에많은 尺數를 써버렀지요.
그러다가 中途에와서 事情이 생겨서 갑작히 한卷으로 마련하려니까 無理가생기게되여 前後에 壓縮한 군데군데를 너허서 그만 여러場面을 버혀버렸어요.
또한가지 浿城學校같은 光景을 苦潮하기를 일부러삼갓서요 그것은 賢明한 여려분께서 理解하실줄 밋어요
마찬가지로 洪水때 집이떠나가고 人畜이죽고하는 처참한光景도 일부러 避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기에도 좀 淡淡한 너무 波瀾屈曲이없는 作品이되였구나 하고 생각했음니다 그리고 俳優들演技도 撮影時日이 짤너서 복가치는 바람에充分히 演習도못하여 生硬한대목이있었든 것이 잇는줄 아러요 아모턴第二作에는 全心力을 다해볼가함니다.
朴基采-「深靑」맨든지 얼마안되는 安夕影氏좀 말슴하여주시요
夕影-좀 거북 군요 나도 朝映의 밥을 먹고 사는 사람으로 제會社作品을 말하기가…그러나 無論缺點도 있었겟지만 演出者의 着想과 手法에 敬服한 대목이 여러군데얘요
少女英采가 故鄕을 逃亡해나올때 동구밧돌부처의 그유모어한 場面이라든지 申友善 朴英采가想愛하려는 그때 저멀니背後로 結婚式行列이 지나가는데라든지 그밧게도 조케본곳이만해요, 朴君은 퍽으나 苦心하섰더군요.
그리고 았가 朴君도 그런所感을 말슴합데다많은 單純한文藝作品만들기도않되였고 그러타고 興行만 생각하는 通俗作品도만들수없고 여기가 어려워요 羅雲奎조차「開拓者」때에그리成功하지못하지 않었어요.
記者-녜 알겠어요「나그네」의李圭煥氏 좀말슴하여주서요.
李圭煥-安君 感想허고 비슷함니다 로-케슌때의 日氣마추기어려운 點이라든지「엑스추라」에애를 먹는일이라든지 모다 그래요더구나 文藝作品이면 그럴사록 性格描寫의 어려움이란 彼此에다 늣겨지는일야요 그런대 았가 文藝作品의 映畵化에對하여 한가지 이야기하고 십흔것은 東京서는石坂津次郎의「若イ人」라거나 田坂具隆의「路傍ノ石」「綴方敎室」등이 모다 成功하였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觀客層의 敎養을 생각하여야할줄아러요.
그리고 그런作品을 만들어내놋는다고 興行上成功을어들가어떨가함을 생각하면 疑心스러운點이만하요.
安碩柱-亦是 純文藝物보다「瀧の白系」라든가「良人の貞操」같은것이 取扱하기쉬울걸요.
記者-마츰 朝映會社에서 오었으니 金正革氏에「無情」評判은 어때요 (第六十三頁에速)
(第一三一頁에서繼續)
金正革-내가 지금 마구 劇場에서오는 길인데아츰도 滿員두번재의午後도 滿員 세번재의이번도「札止」를하고 數百의觀客이도로도라갔어요 大盛況이었어요. 二十餘年동안 「無情」의聲譽가 컷느니만치 누구나 한번볼려 하는듯하요.
白 鐵-觀客層은
金正革-大槪 인테리와 敎員과學生層인들했어요 女學生도않이적인듯했어요.
本社-오래 람슴하여주서 感謝했슴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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