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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송만갑 애도 특집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오호, 송만갑 애도 특집 嗚呼, 宋萬甲哀悼 特輯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이기세․이동백․김창룡․오태석․정남희․이기찬 李基世․李東伯․金昌龍․吳太石․丁南希․李基燦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9-04 昭和十四年四月
면    수 134 (134)
기사
[사진] 作故前의宋先生
★아아, 一代名唱가섯네········李基世
★가시다니웬말인가··········李東伯
★追悼芳魂··············金昌龍
★先生이여, 가섯는가·········吳太石
★門生은우나이다···········丁南希
★吊詩················李基燦
★翁의一代記와그의紀念興行······

噫, 一代名唱의 자최
李基世

一, 一代의 名唱
宋萬甲氏가 世上을 떠난지 오늘이 열흘되는날. 窓밖에 힌눈이 저러틋 푸실푸실나리고 보메 더한층 붓끝이 서글퍼짐을 깨닷게 된다. 名唱으로 當代를 風靡하든 그도 結局은 한줌 흙밖에 못되는 것이거니하면 人生의 虛無를 다시한번 느끼지않을수없게된다.

二, 世上떠나든바로 스무날前에
탑골公園앞에서 나는 그를 우연히 맛났다. 七十五歲의髙齡이것만 그날까진 몹시 정정해보였다 그는내손을 꼭잡으며 유별나게 오래 이얘기하자고했다. 나는 氏와 李東伯氏와 또 그外에 맻분 名唱을 한자리에 뫃이게하고 점심이나 대접할양으로 時間있는대로 세밑도 좋고 새해도 좋으니 다시 통지해달나고했다, 마는 氏는 그길로 갈나진후 아모 통지도없이 새해 첫날에 永々못올길을아주가버리고 말었다. 내가 좀더일즉이 서들었드면 그와함께 자리를 해서 그의最後의 노래를 들었을것을하고멫번, 後悔해보는일도 있지만 한번가서다시못올 그이거든 이제歎息하니 뭘하리?

三, 그의 家門
氏가 처음태여난곳은 全北求禮郡鳯北里였다. 그의 祖父 宋興祿은 當代뿐아니라 朝鮮名唱으로第一가는이라하는데, 그분에겐 光祿이라는 아우가있었다한다. 兄되는 興祿은 名唱이고 아우되는 光祿은 鼓手였다한다. 지금은 그렇지도않지만 그時代엔 名唱과 鼓手의差別이 퍽甚했든모양으로 兄興祿은 名唱으로 어디불이워가게되면다른 名唱과鼓手가하듯이 으레 보교를 타고 아우 光祿은 놋요강에 쌈지에 담배대에 북을 메고 그뒤를 따른다. 어느 大臣집이나 兩班家에라도 名唱인兄은 그 門前까지는 보교를 디려대일수있을만큼 위세가 堂々했으나 아우는요강과 쌈지와 담뱃대와 북을메여야했든것이다 어떤座席에서도 亦是그러하다. 兄은 上座에앉고 아우는 末席에안저야했다. 또飮食床이 나오는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어쨋든 名唱은 잘만하면 대접을 받지만, 鼓手는 제아모리 들고나는 재주를 가젔다치드래도 언제나 下待를 받는處地에있었다고한다. 그리고 나종 노래를 끝맡이고 집에 도라가는때에 일인데, 名唱은 二三百圓던저 주지만 鼓手는 그멫百分의 一도 되나마나하는 報酬를 받게된다고한다.
이렇게되고보매 아무리 兄아우라 하지만 마음이 좋을理없다. 오히려 兄弟인까닭에 마음에 아니꼬운 感情을 더가질수있을지모른다. 光祿도 그 兄興祿의 위세에 창자가 꿈틀거린쩍이 한두번이아니였든모양이다. 그도 러하려니와 興祿의妻와 光祿의妻! 即 말하자면 두동서끼리 늘 사이가 조치못했다는것이다. 興祿의妻는 自己男便은 出入할때마다 으젓이 보교를타고 동생인 光祿은 그뒤를 따른다고해서 업수역이고 재세를 해서 걱정이고 그 동생의妻는 같은 兄弟로서 兄은 타고다니며 아우를 뒤를 딸게하는것이 부화도났으려니와 그것을가지고재세하는큰동세가 맛당치않어서 밤낫 부엌에서 뚝딱뚝딱거리는것이였다고한다.
이러는 분위기가 싫었든지 아우光祿은 어느날 슬그머니 어디론가 자최를 감추었다는것이다. 집안이 궁금해하지 않은것은아니였겠지만 도모지 消息이없었음으로 찾을길도 막연하였다. 그러다가 四年만에 光祿은 도라왔었다.
도라온뒤에 어느座席에 亦是前과같이 兄아우가 불이워서 前과 똑같이 兄은 보교를타고 아우는 요강과 담뱃대와 쌈지와북을 메고 딸아갓다한다. 따라가서 亦是 末席에서 북을치고있다가 兄이한곡조 불은뒤에 光祿이 姿勢를달리하며.
「저도 한곡조 불너올 니겠읍니다」했단다. 座席에서 모다들 네가 무슨 노래를 부르겠느냐고 하매
「한 四年間 濟州道가서 노래공부를 하느라했읍니다」하고 대답했음으로 그렇면 어디한마디 불너보라해서 불는 曲이 지금우리가 이르는「盡陽歌」라는것인데 이「盡陽歌」는 二拍子의 노래다. 그러니까 二拍子의 노래를 처음으로 光祿이 불느게된것이다 그는제주島에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의 울분을 품은채 늘 공부해낸것이라한다. 어쨋든 서럽게들리는노래인것만은 사실인데 全羅道女人네들의 우름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면 이「盡陽歌」미슷한 曲調다 남편하고 쌓오고우는 우름두, 누가죽어서 우는 우름두, 모다그렇한것을 發見한일이있다.
이러하여 宋氏家門이 활짝名唱의宗家로되여 代々를 내려온것이다. 宋萬甲氏의 아버지宋前龍이도 有名하진못했으나 名唱이어서 宋萬甲氏가 아버지로부터 노래를배우는데 봇다리를질머지고 山水좋은데를 찾어다니며 배왔다고한다마는 宋萬甲氏는 「노래하는 사람은 布木장수와같아서 모번단을 달나는 사람에겐 모번단을 주고 무명을 달나는사람에겐무명을 줘야한다」고 主張해서 그祖父나父親이 불느든 노래 그대로를 繼承하지않고 말하자면 通俗化시켜서 누구나 알어들을수있는 노래를 불넜다. 그러므로 그父親은宋家를 滅亡시키는 子息이라고해서 藥을 멕여죽이려고한일도 있고 또 꾿꾿내집에 있지못하고 쪼껴나서 朝鮮八道를 도라다니며 노래를 불넜다 그래서 그의노래는 더한층 널리퍼젔든것이다.

四 , 그의弟子들은
朝鮮방방谷々에 없는데없을것이다. 直接 그에게서 배우지않었다 치드래도 그가 가르처낸 弟子에게서 배운 弟子들이니까. 그러므로 名唱, 妓生할것없이 이렇게된 弟子는 數千名에 達하리라고 믿는다. 直接늘 따라다니는 弟子도 언제든지 二十名은 되였다. 누구나 흉내낼수있는 목소리에 또알기쉽게 가르처주는까닭이리라. 李東伯氏나 그外에 有名한 名唱들에겐 弟子가 한사람도없다. 이것은 宋萬甲이 그들보다 읏뜸이여서 그런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朝鮮의 數없는 광대와 妓生들이 죄다 宋萬甲의唱法으로부르지않은 것이없고보매 그는 斷然 當代를 風靡한 名唱이라하지않을수없는것이다, 지금 그의弟子로 生存한이가 朴綠珠, 金正文等이다. 金正文이같은이는 그弟子도 相當히 많은이로 지금 나히가 五十에갓가웁다.
그런데 그의最後는 너무나쓸쓸하였다. 나는 新聞에서 氏가도라가섰단 記事를 보자 곳上往十里 氏의 最後를 마친宅으로 쪼차갓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왔다 좀더 번화하고 좀더 풍성했으면 조암즉도하려니와 그렇게되여야 當然할것같이 생각되였든것이다. 슬하에 二男三女를 두섰는데 막내딸은 今年에 다섰살먹이 라한다. 氏가 生存에 이딸을어떻게 愛지중지했든지 친구들중엔 그를潮笑하여 주책없는者라고까지했다는것이다.
그럴밖에없는것이 氏는 일흔한살에 이딸을얻었다. 드르니 이아이의어머니는 금년이 스물둘인가 셋인가한 젊은女人이리고 하는데 나는 아직 본일도없다.

名唱 宋萬甲 一代記

조선의 국창으로 조선성악발달에공현이만튼 송만갑(宋萬甲)씨는 향년七十四셰를 일기로하고 一月一日오후에 영면하고마럿다.
송만갑씨는 조선의명창 송흥록(宋興祿)씨의 종손으로 진주(晋州)에서 출생하야 전남구례(求禮) 전북남원군운봉(南原郡雲峰)에서 살었섰다.
그종조인 송흥록씨는 비곡(悲曲)을 잘하얏섰다. 리경화대장(李景夏大將)이 진주병사(晋州兵使)로 있슬때에 촉석루(矗石樓)에서 잔채를 베풀고 송흥록씨를 불너「노래를 한번불러 여기 모힌사람을 울녀보아라 만일 울이지못하면 벌을주리라」명령하얏다. 송씨는 이러서서 노래를하얏드니 모힌좌중이 모다들감격하야 눈물을 흘닌지라. 이에 그묘기(妙技)에감탄하얏다고한다. 송만갑씨는 이러한명창의 혈통으로서 七세때부터 노래공부를 시작하얏는데 천재적 소질을타고난 송만갑씨는 경탄할 진경(進境)이있어 十三세때에 조선의명창으로 일흠이 났으며 그 一생중에 그때가 가장 잘하얏섰다고까지 말듯게되었다. 그뒤의 그의 진경 끗칠줄을모르고 날로날로 진보되여 국창이되고마랐으니 그것은 물론 천재적소질을 가지고 있섰기 때문에 그재질을 완전히 발휘하얏다고 말할수있을것이다 필자도 어려서 그의노래를 자조 들을일이있었는대 다른사람의노래는듯기실헛썼으나 그의노래는퍽으나 재미있었다. 그것은 노래를잘하고 못하는것을 분간하야서가아니라 그의몸짓손짓하고 구성지게하는것이 재미있어서 철몰으는어린마음에도 흥미를늣겻섰다 자란뒤에알고보니 그것은 창극(唱劇)이란것으로 원각사(圓覺社)시절에 송만갑씨가 창조한것이라고 한다 원각사라는것은 구한국(舊韓國)사절에 륭히황제(隆熙皇帝)께서 조선성악회발달을 도모하랴고 서대문안에설치하고 국창 김창환(金昌煥) 송만갑(宋萬甲) 렴덕준(廉德俊)을 그간부로분부하시고 부사장(副社長)이 민영환(閔泳煥)대감이었었다. 그럼으로그때의 세력은 상당하얏섰다고한다. 원각사에서세사람은 지금까지의 노래를唱劇으로 구성한것이니 그전까지는춘향전이면은 그노래뿐이지 극(劇)이란것은 없었든 것이다 그것을지금 우리들이보는것과가튼 극으로 구성하얏는대 춘향전(春香傳)을하는데에 사람이(배우라고말할까)二百七十餘名이 필요하다고 지금우리가보는것보다 그규모가 웅대하얏스며 또 속되지안헛슬것이다여기서 송씨가 구성한것이 춘향전과심청전이라. 이두가지가 지금까지 전해왔으며 그외의 가극도이것을 모방한것이니 그가 조선구악게에 끼친공적은 태심한바있다 원각사란것은 그성질로보아 외국에서는 그례가 만흔 국립극장(혹은 황실극장)이라고 볼것인데 불행히도 三년만에 해산되고마랐다 송만갑씨는 리재각(李載覺)전라감사(全羅監使)때에 참봉(參奉)이되였고 원각사 시절에 륭히황제(隆熙皇帝) 어전에서 분부에 의하야 노래를불렀든바 가상(嘉賞)하시고 감찰(監察)을 봉하얏다. 원각사가 해산되자 궁내부별순검(宮內府別巡檢)의 실직에 섰었고 三개월후에는 전임이 되였었다. 감찰과 순검이라면은 그거리는 비교할수도없이 감찰이 높지만은 그러한 관명(官名)을가저도 그시절은 천대를 바덧슴므로 순검(지금의 순사)의 실직에 있었든것이다. 그 뒤에 노래공부와 제자교육에 힘을 쓰고 말년에는 고 김종익(故金鍾翊)씨의후원을 어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설립하야 조선성악의보조와 향상발전에 여생을바치고 만흔제자를 가르첬었는대 성악연구회가 금일의발전을 보게된것은 누구보다도 송만갑씨의공적이 만타고한다. 그가가르킨 제자수효는 千명이상이며권번수효도 진주(晋州), 마산(馬山), 부산(釜山), 동래(東萊), 대구(大邱), 전주(全洲), 광주(光州)등 十여처이며 박록주(朴綠珠), 김련수(金鏈洙) 김광순(金光淳)과가튼 명창들이 그밋테서 훈련바든 사람들이다.
그가 가장 잘하는노래는 춘향전 심청전, 적벽강(赤壁江)등 화용도(華容道)장면이다. 그런데 중년에 상처를한후에는 심청전의심봉사가상처하고 심청이를 안고단이는 구절을당하면은 자기생각에 목메여소리가 나오지안함으로 노래부르지못하고 우슴웃는장면이만히나오는박타령을 만히 불렀다고 하니 이러한데서 그의천재 예인(藝人)다운 편모(片貌)를 차저볼수있다. 그는 이러한 예인성질이 견고하였음으로 돈모으는데는 관심을갔지안코 노래를 연구하고교수하는데만 골몰하얏고 따라서돈안밧고 교수를 만히 하얏스니성악연구회 시절에는 돈안밧고 가르치는 제자가 반이상이라고한다
그뿐만이안이라 아는사람이 청하면은 입은옷이라도 버서주는온후한성질임으로 친구들이나 제자들은누구나 그를 존경하고 정답게 녁였다고한다. 이러한사람에게 모혀있는재산이 있을 이치는 만무한일이다 그에게는 두아들과 손자四人과 손녀七人 증손녀二人이 있는데 두아들은 관리생활을 하었었고 그밋트로도 그게통을 이어갈공부를 하지안했다니 혈통은 있으나 후게자는 그자손중에서는 끈어지고 마렀다. 이리하랴 조선성악게의 거성(巨星)은 그만 떠러지고 마렀다. (사진은고송만갑씨)

李東伯氏吊辭

송감 찰
송감 찰
송감 찰

아 슬품니다.
자소 이장으로, 우리예술 성악계에, 가치 있어 백수만년에 간담 상론하□더니 감은온 천추의 고명을 남기고 구천에도라가시니 유명이 노슈하매 통한이 무궁하오 한잔으로 위로하오니 연화세게에 부귀를 누리시고 영혼이라도 우리 성악계를 도와주시오.
나미아미 타불
우생 리동백 배곡하옵니다

金昌龍氏吊辭

維歲次己卯正月戊戌朔初五日壬寅 友生金昌龍哭告于 故監察宋公之靈公於樂壇北泰山何其卓絶何其淸閑
回想前蹟圓覺長安繼剏本會棟樑更新身經榮苦交盡富貧 三千槿域陶醉幾人三世國手踵出 一門界面泣鬼羽調遏雲泰在愛末一時惜分有事坡州候愼屏郵訃所到眞向漢城哭泣無逮淮識情嗚呼哀哉尙


宋萬甲追悼紀念 名劇『春香傳』을
朝鮮聲樂硏究會에서

市內益善町一五九番地에本據를둔 古典唱劇界의最高權威者인朝鮮聲樂硏究會에서는 名劇春香傳을아즉까지 世間에詳細히紹介되지못함을 遺憾으로生覺하고以來苦心蕉慮하든바 金容承의猛打한「히트」는그를나눠前後篇으로 脚光의榮을입게되였는데當代男女名優들의總動熱演으로 오는一月廿九日부터六日間 市內西大門밖東洋劇場에서 上演하엿는바 二十九日三十日三十一日의 三日間은前篇을上演하고二月一日二日三日의 三日間은後篇을上演하여大好評으받었는데總登場人物은五十餘人인바重要멤버는다음과같었다.
李夢龍………………丁南希
成春香………………朴綠珠
月 梅………………林小香
房 子………………吳太石
香 丹………………吳弄姬
卞學道………………趙相鮮
刑 吏………………丁元燮
軍奴使令……………金演洙
執杖使令……………姜太弘
執 事………………金世俊
郎 廳………………林鍾城
奉 事………………趙永學
娥 姐………………金萬洙
女 英………………金初玉
戚夫人………………金月中仙
弄 玉………………金 峯
綠 珠………………成美香
獄司丁………………金芳淳
指 揮……‥李東伯
仝 ………金昌龍
演 出………朴生南

丁南希氏吊辭

송선생님
선생님이 가장 애호하여주압든 문생정 남히는 삼가선생님령전에 배곡하옵니다.
송선생님 송선생님
선생님은 하날이 내신 유일한 재품으로 사게에 독보하시사 듯사옵건대 칠세붙어 유년명창으로 진세를떠나시는날까지 존명이사회에진통하시고 또유일하신 성지로 우리성악게를 위하여 만히헌공하시였고 어린후생의장래를 위하여 교도하신공덕이 막대하심을 깊이통감하나이다.
선생님 선생님은 참으로 우리성약예술게의 동향이시였고 원료요또중진이시였나이다. 뿐만아니라 저의성악연구회에 커다란 공로를 세우신선생이시외다.
선생님 선생님은 진실로 저의 성악예술게에 주석이시압더니.
오호 선생이 지정텬명에 순응하사 일조 침가로 천고영별하시오니 유유명망은 만세유전 하시려니와 치약한 문생은 무삼힘으로 전진하오며 다사한 저의회관은 어느선생의 도음으로 선생의 후업을 게승하오릿까, 없저사모하옵건대 이런 가삼은 찌여질듯하옵고 유약한마음은 비통하여 마지안사의다.
복원하오니 구천에 게신 제대선생과 동심협의하시사 우리성악예술의 본진인 저희의성악연구회를 영구히 구조하여주시압고 극락의련화옥애에서 영원히 만수무강하시압소서
오호 애제 상 향

吳太石氏吊辭

송선생님 송선생님
저난 사랑하시든 오태석이올시다 이제 선생님 영결식장에 당하와 왕석을 회상하오면 통박무궁이읍니다. 고향에있을때붙어격린에 동■하야 부모와 같이 모서있서 태두같이 미더온중 우리 성악회가 창립후로 우리선생님의 공적이 춘추불휘케되였읍니다 본회의현상이 가위구체이미온 이때에 창회중도에 별세하시니 최량진탄 없저간절하옵니다 유명어 노주하와충정을 미진하옵시고벽수비풍에 음한휘루할뿐이옵니다. 내내 연화세게에 무량하옵소서어진자제있으니 가사를 이즈시고 사랑하시든 복동이는 저의모친이 양육한다하니 이망지심푸르시고 왕생극낙하옵소서
나무아미타불. 상 향

吊 詩
李基燦
落花 水流 小乾坤
人事 茫茫 不可論

公我遊與 今幾年
永訣歸路 淚盈中

人間五福 壽爲先
七十額歲 夢中春

唯一無二 美味聲
何時復生 世人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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