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문헌
검색 > 문헌 > 기사
백화난만 30년간 명류여성 성쇠기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백화난만 30년간 명류여성 성쇠기 百花爛漫 三十年間 名流女性 盛衰記
종    류 기사 記事
필    자 범영생 軓影生
출처정보 여성 女性
연    도 1938-11 昭和十三年十一月
면    수 46 46
기사
지난날에 이름있던 여인네들-나는 지금도 눈만감으면 그네들의 모습을 찾어낼수가 있다. 청년회강당에서 노래하던여인, 연단에서 부르짓던여인, 붓끝을놀려 문명을날니던여인……이제는 세상을떠난 재등 예전 총독이 조선에 집회와 언론의길을 터주게되자 들어앉었던 부인네들까지 참으로꽃답게 제일선에나서고 만것이다.
그때가 벌서 근이십년이나 옛일이다. 그때에 이름을 날니던 이십안밖의 부인네들도 이제는 사십객이다-되고마랐다. 남자의사십은 한참 일할나이지만 여자의사십은 손자볼 나이다. 당시에 미희(美姬)로뽑내면 여인네들 지금도 가끔 거리에서 맞난다. 그럴때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 저이도 발서 저렇게 늙었고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사람이란 의례히 세월이 거듭하면 늙는것인줄 누가모를것 아니지만 한때유명하던 여인네가 늙어가는 형상같이 쓸쓸하고 아까운것은없다. 더옥히 조선의 여인네는 사십만바라보면 고만 몸을가꿀생각도 조촐하게 차릴기력도 거의 이저바린가싶이 몸치장이 아모렇게나 되어바리고만다. 그럼으로 더한층 딱해보히는지도 모른다. 내가쓰는 글이니 아모라도 내가알던여인, 내기억에있는 여인들중에서 이글이 시작될것은 어쩔수없는일일가한다. 그때- 그때라면 지금여학교를 졸업한분이 채 나기도 전이다.
나는 신문사기자이었읍으로 집회라고는 빼지않고 찾어다녔다. 그랬든만치 당시 연단 강단에서 이름을날니던 부인네는 거의다- 맞나보게되였셨다.
지금 생각해도 기역에 분명한이는 리화학당출신 성악가 「림배세」양이다. 그의날신한키, 아담히채린 옥색 아래웃옷. ……조심성스렵게 연단에올라 수집게 인사를하면 만장한관중은 손벽이 깨저라하고 뚜들겼다.
남모를 이내가슴……
하고 서양명곡에 조선가사를 불여서 노래를하면 노래맛을 아는이나 모르는이나 도취가되고 의례히 그이튿날 신문에는
옥반에 구슬을 굴니는듯한 림배세양의 독창에 청중은 여광여취……
다. 사진까지 계재가 되는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학예회종류에 지내지않었으나 그때는 그만하면 유명할수있었다. 림양은 미국에 건너간지 십유여년 아즉도 돌아오지않는다. 필경 그의 이마에는 가는주름이 자폈을것이다. 배림세양이 서양노래를 한참부를때 「권애라」라는 용사가 등장을했다. 개성자근아씨로 몹시용맹한 분이었다 연설도 꽤하고 숙기가 사내보다 낳은 점이 있었다. 무슨 연설회날이었다. 연설이 한참 고개마루에 다다랐을때 권애라양은 테-불을치며
어째 서양소리만 소리고 조선소리는 소리가 아니란말이요
하였다. 관중은 일제히
[사진] (허영숙씨)
올소!
소리를 질렀다. 이말끝에 권양은
그럼나도 개성난봉가나 부르겠소
하였다. 객석은 물끌뜻했다. 기생이냐, 갈보냐 하는사람, 오-냐조-타 하는사람. 그러나 권양은 목소리를높여 조선의민요를 어째 마음없는 기생에게만 내마낀단말이요. 모름즉이 우리네 일반이 다-같이불너서, 서양사람에게 집집이불으는 민요가있듯이, 우리들도 그같은 노래를 갖어야할것이요. 노래없는 가정은 쓸쓸하기 사막같소……해가며 기어코 개성난봉가를 한마디 불으고마렀다.
박연폭포 흐르고내리는 믈은……
목청을 높이빼니 종로청년회 강당은 그만 잠잠해지고 마랐다. 옆에서 듣고계시던 윌삼 이상재선생이 나종에 권애라양의 머리를 쓰다드므며
에, 숙기가 쓸만하다
했다고하나 필자는 목도는못했었다. 이만큼 떠들고 나선권애라를 세상은 그만두지 않었다. 기생출신인가 보다고 첩이되야달나는 은근한 분도도있었고, 여장부라고 존경하는나머지 결혼을청하는 순정 청년도있었다. 그러나 그는 필경 개성가서 평범한가정에서 지금은 평범한 어머니노릇을하고있다. 여학교출신이 개성난봉가 불렀다고 기생으로아던 그당시의 인심을 지금생각하면 웃읍기 한량없다.
그당시에 조선서 처음이나 진배없는 순문학잡지로 창조(創造)라는게 있었고 뒤를이어 폐허(廢墟)라는 잡지가있었다. 이잡지를 만들어내는 분은 김찬영, 김만주, 오상순, 김동인, 염상섭, 남궁벽, 김환등등 여러분이었다. 이들틈에서 한가지의 색다른꽃이 피었으니 그는 시인 망양초(望洋草) 김명순 「金明淳」양이다. 김명순양은 당시 십구세 꽃같은처녀, 강단에올나서 조선서는 처음인 신시랑독을하고 피아노를치고 그와 옷득한코, 노-불한 거름거리, 영채있는 동자는 관중을 충분히 취하게했었다. 그러나 모든 여류시인이 불행하듯이 김양에게도 불행만이 뒤를딿았다. 서울서 우울하면 동경으로 가고, 동경서 불우하면 경성으로 돌아오고-몇차례 이 코-스를 더듬는동안에 가엾게 그는 청춘을 허송하고 마랐다. 결혼도 해본일없이 사십을먹은 오늘의 그의심중은 자못 처창하리라고본다. 요사히도 양장에 양산을들고 「시」원고뭉치를 귀여운 애기나같이 싸들고 거리도 내왕하는 김명순양을 가끔본다. 허영숙, 라헤석, 김원주 모도가 그럭저럭 의식의걱정은 없이 지내것만, 그만은 시인인까닭에-시경(詩境)에서 소요했던 탓으로 현실에서 버림을 받었는가 생각하면 짝없이 동정도 하고싶다.
[사진] (서은숙씨)
「윤영운」씨도 또한 유명한 여자의 한사람이다. 동경여자고등사범을 수재로 졸업한 재원으로써 졸업당일에 전학교을 대표하여 국어로 답사를하였는데 그답사가 어찌도간고하고 유창하였던지 전학생과 선생들을 모다 울렸다니 그럴듯한일이다. 그러나 이윤씨는 진명학교 모선생과 결혼하였다가 파경을 당하고 한동안은 「함빈」으로 방랑생활을 한다드니 지금은 소식조차 모면하다.
[사진] (고 봉 경씨)
그다음으로 우리는 「허영숙」여사를 이즐수없다. 여사는 조선의처음인 부인의사로써 일세의 대문호 춘원과 결혼하여 지금끝 잘 살러오고 요새는 산원(産院)이라는 사업까지 시작하셨다.
그다음으로 「김미리사」도 유명한분이다. 서대문예배당 아래칭에서 조고마한 여자학원을 창립한것이 시초로 악전고투하야 만란을 배제하며 활동하는중 한동안은 기독청년회관에서 연설도 많이 하였다. 지금은 훌륭한 근화학원을 완성하고 원장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김명순양이 여류시인으로 꿈을그릴때 칸파쓰에 사랑을그리든 여류화가로 「羅惠錫」여사를 이즐수없다. 그는 당시 법학사로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청년지사로 손꼽든 김우영씨의 애인이었다. 그가 기미운동에 참례해서 옥창에드러가매 애인의 일신을 구해내고저 김우영씨는 단연 변호사개업을한것은 너무나 유명하였다. 철창에신음하는 곤경을 구하기위하야 법정에서 열변을토하든 김우영씨의 풍모는 자못 심각한바가 있었을것이다. 이시대를 전후해서 춘원리랑수씨의 애인이요 동경류학생중의 꽃이라일컷든 허영숙여사가 애인의 『폐환』을 일생을두고 간호를하겠다는 다고 의학을전공한것도 기역에 남아있는 일이다. 그리고나서 유명한이는 「김원주」여사이다. 여성잡지를 조선서 처음 창간해가지고 리화계통의 여류집필가를 망라해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니 절문문인들은 즐겨서 그의 서재를찾아갔었다. 그러는틈에 김원주여사의 쓸쓸한 남편노릇을하든 모씨는 마침내 경성에서 길이 자최를 감추고 남어있는 김원주여사의 이름은 날노높아저서 그는 동경으로까지 건너가 붓을 가다듬다가 요사히에 와서는 마포근처 어느암자에서 불경으로 도를닦는다는 소문을드렀다. 그러고보니 충청도 백양사에가서 중의집에 몸을붙어 채필을 가다듬는 라혜석여사와 좋은 한쌍일것이다. 김우영씨의품에 귀여운애기를 떼어놓고 홀노떠도는 라혜석여사의 오늘을 필자는 결코 행복하다고는 보지못한다. 그러나 라여사본인은 오히려 오늘의 자유로운 처지와 활달해진 성경을 톡톡히 즐기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다음으로 등장한 문제의 여주인공은 「윤심덕」양일 것이다. 그는동경상야음악학교 재학중에 목소리좋은 아가씨로 임의 이름이높았고 경성에 돌아와서는 ○○여고보의 선생까지 되였으나 그의진보된 행동은, 세상의 호기심을 몹시 꺼럿다. 세상의 꽃다운 여류성악가들이 대개는 한번식 시련을받는 마수에걸여 그는 무참히도 그검은 손아구에서 버서날길을 잊어바리고 마랐다. 지위도, 직업도, 희망도 다 내바린 그는 일시 『할빈』으로 표랑도했고 토월회 극단에가입하야 자기의운명 그대로를말하는 「동도」라는 연극의 주인공도되여 마음껏 세상을 저주도해보왔으나 사러갈길을 잊은 그에게는 죽음의 길이 똑바루 보일뿐이었다. 윤심덕양의 이처지 이심경에 극히 동정하는 김우진군은 마침내 윤양의 『사의찬미』의 반주자가되여 덕수환상에서 현해의고혼이 되고마랐으니 『정사』의 신기록이요 신문거리의 호화판이 되고마랐다. 이로써 한때유명하든 부인네의 이약이는 거이 끝났는가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식있는여자가 존경받는여자나 재산있는-자기보다도 이름없는 청년에게로 시집을가면 세상은 잠자꼬 보지않고 이러니 저러니 입끝에서 떼신기지를 않는다. 이런견지에 있어서 「박인덕」여사만치 당시에 세상의 물의를 도도은이는 없었을것이다. 피아노 가르키러 다니든집 제 윤심옵바에게 시집을간것이 맛치 돈만보구갔다는 지목을받게되여 일시는 한참 야단들이더니 그도 어느틈에 일남일여를두고 기어코 남편과는 남이되고 미국으로 새출발을하더니 인제는 사십객이되여서 논총계몽운동에 여염이없다. 이사람 저사람의 한참시절을 지금와서 돌라보고 또 오늘의 그들의 처지에서 결론을가저보면 역시 여자는 일즉이 착실한 남편을맞나 가정을 온전히맞는게 일생의 큰 터전이되는것이며 세상을위하여 일을하랴면 「김활란」양이나 윤성덕양이나 그외의 모모 미스들같이 애당초에 연애와결혼에는 눈도 거들뜨지 않는게 상책일것 같다. 부인네에게는 아즉도 사랑도, 지위도, 사업도, 재산도 모두를 아울너 온전하게누릴 행운은 하늘이 주시지 않는것만같다.
마지막으로 「박화성」여사도 유명한분이다. 조선문단에 여자로는 처음 소설을 발표하여 춘원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신문소설로 「백화」라는 장편을 발표한것도 역시 여자로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요새 「목포」에서 이러니 저러니하니 풍설이 있으나 우리로서는 알배가 아니다. 이외에 정중명, 김필순, 유각경 서은숙, 고봉경, 황신덕, 길정히 여러분이 있으나 이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끝)-
이메일주소 무단 수집거부 권리침해신고 문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