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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사절 최승희에게 보내는 서―희화화된 조선 정조―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무용사절 최승희에게 보내는 서―희화화된 조선 정조― 舞踊使節崔承喜에게보내는書―戱畵化된朝鮮情調―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한설야 韓雪野
출처정보 사해공론 四海公論
연    도 1938-07 昭和十三年七月
면    수 148 148
기사
우리는 가끔 거리의 寫眞館陳列窓에서 조선衣冠을 차린 外國人의 寫眞을본다. 그들은모다 約束이나한듯이 거진 한모양으로 갓을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긴담뱃대를 들고 寫眞을박힌다.
바루 昨年에는 映畵監督으로 그令名을 世界에날리든 스탄벅이 이땅에와서 朝鮮음성을 입고 박힌 寫眞을 어떤雜誌에서 본 記憶이 아직도 歷然히남아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지금껏 第一내눈에 깊이 남아 있는것은 어려서 즌고개 어느寫眞館에서 본 어떤 일본내지인의 조선음성을 입고 박힌寫眞이다. 그는 勿論 얼굴이나 모든 체모가 조선사람과 近似하였다.
그러나 나는 一見그것이 조선사람이 아닌것을 알았다. 나뿐아니라 아마 보는사람은 누구나 나와같이 곧 그正體를 알수있을것이다.
勿論 그 어느나라사람이고 조선 오는것을 마대라고 할理由가 없는것같이 그들이 조선을觀光하고 朝鮮人의 生活相을 엿보려하고 또는 朝鮮을生活해보고싶은마음에 朝鮮음성에 장죽을 물어보는것을 차라리 반겨하여야 할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決코 국수주의자나 민족주의자모양으로 事物을 針小棒大해서서 誇張하거나 일부러 스럽게 假飾을꾸며서 朝鮮을 보이고 싶지않고 또文明人이 蠻地를紹介하는때에 그未開人들의 風俗習慣을 戱畵化하는것같은 그런惡趣味를 그저黙認해버리려고도 하지않는다.
歐米人이 未開人을 紹介하는데 있어서 恒常그低俗, 卑猥한面과 이미 자최를감춘, 또 감추면서 있는 舊習과殘像 새삼스레 뚜러내다가 그것을 擴大하고 潤色하고 戱畵化하는것을 우리는 늘 보고있다.
歐米 映畵에 나오는 支那를 보라. 그들은 언제든지 한갈같이 支那의 醜態와 劣狀과 舊風을 일부러스럽게 大寫하야 그것으로써 文明人의 惡趣味를 滿足시키려하고 나아가서 自尊的인 哄笑를 거게서 亨樂하랴 하지않는가.
얼마前 佛蘭西에서 撮影한 『吉原』이라는 映畵는 『도시하라』와 人力車로서 日本을 象徵하려한것이라하야 各方面에서 한참物議가 粉粉하였다. 우에서말한바와 같은 이른바 文明人의 惡趣味가 多分히 그映畵를싸고 돌기따문이니 日本으로서 反對하는데에는 勿論 充分한理由가있다고 생각한다. 日本을 소개한다면서 명예롭지못한 部面과 한時代 지나간 옛날의 面貌를 外國에 소개하려는것도 옳지못한일이거니와 도대체 그特殊한 部面이 너무도 今日의 日本의相貌를 彷佛케 하지못함이 클것을 足히짐작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러한 浮薄한製作態度로써 한개의 藝術作品이 만들어질 까닭이 없는것이다.
萬一 어떤 外國人이 다른 어떤나라의 特殊部面을 다만 自己들의主見과 구비로 골라가지고 더군다나 稚劣과 未開를 웃음으로 觀望하는 오만한 成人의 心事로써 그것을 戱畵化한다면 우리는 그腐爛한 藝術的衝動을 唾棄하지 않을수없는것이다.
그런 意味에서 우리는 지나를 取材한 歐米人의 映畵를 往往 더할수없는 憧怒와 憎惡와 侮蔑로써 對하지 않을수없는것이다. 팔, 박크의 『大地』가 일즉 우리가 본일이없는 높은 鑑賞을 觀衆에게要求하는것은 決코 그 시츄에 숀여나 데-렐쓰의 리알리티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實로 作者의 이른바 文明人의 그 오만한 惡趣味로부터 解放된 그製作精神에 그理由가 있는것이라고 우리는 생각는다.
나는 얼마前 松竹會社?의 어떤 發聲映畵에서 料理手 『李상』을 보았다. 卽 『李상』이 主題쯤된 映畵였다. 그 『李상』은 動作이고 台辭고다 모다 朝鮮인을 숭내내려고 무리히 애쓴 흔적이 歷歷히 보이였다.
그것은 異色趣味를 느끼는 滿場觀衆의 喝采를받았으나 그 웃음은 어지 나에게 더할수없는 憎惡와 侮蔑感을 가지게하였다. 『李상』은 한개 戱畵化된 人間이고 現實에서보는 우리들의 『李상』아닌까닭이다. 『李샹』이라는 人間을 分明히하고 우숩게하고 兼하야 제본바닥 사람과 格差가 있게하기爲하야 그렇게 言語와動作을 유표히 戱畵化한것이나 대채 이러한 態度가 이른바 藝術과 무슨 因綠이 있을것일가.
藝術이라는 이름아래에서 實로 많은 藝術이 지금盛行하고 있는것이다. 興行價値云云으로 방패막이를 해버린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나 그밑에는 實로 우리로하여곰 아니 人間으로하여곰 깊이생각케하는 무엇이었지 않을가.
그런데 不幸하게도 우리는 좀더 가까히 우리들藝術家中에서 如上한 不謹實한 藝術態度의 한개 實例를 發見하였다. 그것은 昨年中 渡米告別公演으로 朝鮮全士를 들석하게하고 지금 바야흐로 海外觀衆의 絶讚을傳하는 崔承喜의 舞踊에서다.
내가 보고 느낀바로는 朝鮮을 取材한 그의舞踊에있어서의 朝鮮情調는 確實히 戱畵化되여있고 浮薄히 歪曲 되여 있다.
나는 崔承喜의 舞踊을 前後二三次밖에 보지못하였다. 나는 여기서 決코舞踊評을 試하랴는것도 아니오 또 그럴만한 豫備智識도 가지지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初期의 몇개作品은 나에게- 全然 門外漢인 素朴한 한개 觀客에게 實로 깊은印象을 주었고 또 그것은 지금까지 머리에 分明히 남아있다. 더욱이 印度人의춤? 이던가 한 것은 놀란만한 壓力을가지고 지금도 기억을 肉迫하고있다.
검은 옷을입고 쇠사슬을 몸에감은 한개의人間이 靈肉을 두드려 慈悲한大地를 안으려하고 자유스런 蒼空을 날르려하는 그 히로익하고 偉大한 努力과 力學과 慹慾을 거게서 읽을수있든것이다. 어듬에 허매는 한개의 목숨 여게서 빛을찾아본다는것은 더할수없이 기뿐일이다. 卽 한개의 목숨과 한개의빛이 爾餘의 목숨과 빛을 槪括해주기때문이다.
藝術이 한개의 具体的 個別的인것으로서 全体와 普遍을 보여주는 所以도 여게있으며 또 여기에藝術의 偉大한 힘이 있는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舞踊藝術의 힘을 崔承喜의 舞踊에서 처음배웠다고 할것이다. 그리고 그가 오늘의 盛名을 얻은것도 그러한 에네르깃슈한 그의 藝術的天分에 있었든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어느座談會에서의 述懷에서도 그의 不斷한 努力을 알었고 또 그것이 그의 今日을있게한것인것도 알았다.
그리하야 그의 告別公演도 非常한期待를 가지고 구경하려 갔었다. 勿論 地方巡廻公演이니까 純全한 硏究發育의 그것과다르겠지만. 오래간만에 그의 舞踊을 接하는 待望의 눈은 첨부터 失望을 느끼지않을 없었다.
그러나 이말은 그公演이 순전히 職業化. 營利化한 이른바 興行的인 너무도 興行的인 公演이라는것과 또는 그公演 례파트리의 거이全部가 天勝이나 天華나 오레레타나 심지어 써-커스의 딴쓰와 區別하여 생각하기가 甚히 困難하다는것을 意味하는것은 아니다.
그는 이公演에서 한개의 좋은作品을 보여주었으며 또거게서 그의 놀라운天品을 보여주었으나 여기서는 그것을 들어 말하랴는것도 아니다. 實로 이 小論의 目的은 그의 舞踊에낭타난 그릇된 朝鮮情調를 指摘하는데에 있다.
그가 朝鮮固有의 춤에 留意하야 그것을 現代化시켜보랴는 熱意만은 우리도 極口讚揚하는바요 또同慶을 禁치못하는바다. 그는 옛朝鮮을 象徵하는 멫개의 朝鮮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춤은 全혀 옛朝鮮사람의 戱畵化에 지나지안는다. 僧舞도 그랗고 劍舞도 그렇다.
거게서는 朝鮮인의 特性도 찾을수없고 조선인의 핏줄은 더욱 찾을길이 없다.
다만 外國人- 文明人이 옛조선을 숭내내고 우숫개하는듯한 허재비의 動作이 있을뿐이다.
以上에서 朝鮮읍성을 입고 조선固有의 긴담배뱃대를 든 外國人의 寫眞을 말하였거니와 崔承喜의 조선춤이주는 印象은 꼭 그것과 같은것이다. 조선옷 입은 外國人- 文明人의 얼골에는 確實히조선을 숭내내여보려는 일부러스러운 誇張과 또는 우습고 자미있게 보이려는 戱畵的意味와 웃음이있다.
崔承喜의 조선춤에도 이러한 惡趣味와 嘲笑가있음을 유감이나마 우리는 發見하지않을수 없는것이며 또 번거러히 눈에 걸려서 견딀수가 없었다.
그것이 外國人인 境遇와도 달라서 우리의期待가 큰 崔承喜이고 보매 落望과 憎惡는 더욱 크다.
그의 朝鮮춤에는 眞摯味와 眞實性이 缺如한輕蔑할 浮■와 그릇된 模倣性이 있을뿐이다. 조선춤을추는때의 그의 눈에는 건공에서 조선을 笑視하는 不眞實한 冷嘲가 빛나고 그動作에는 心靈과 또는 溫故知新的 精神에서 울어나지 안는 假作이 있을뿐, 그러기때문에 그것은 한 개의 개가운 模倣에 지나지않는것이다 마치 外國人의 朝鮮옷을입고 조선인을 숭내내는것 같은것이다.
숭내는 結局 숭내에 끄치고 마는것이니 그것은 卽 그숭내의 對象을 眞實로 生活하고 呼吸하여 血肉으로 消化하지 못하기때문이다. 人間은 따로 人間그것보다 인간의 숭내 잘내는 九官鳥나 원숭이를 더 좋아하는수가 있는것이나 그러나 이렇게해서는 結局 藝術이생길수 없든 것이다.
崔承喜의 조선춤은 조선인아닌 外國人의 喚呼를 받으리라고 우리는 발서부터 生覺한일이었다.
卽 外人은 朝鮮을 깊이모르느니만치 숭내를 참으로 對할수도 있는것이오 또조선이란 땅이 이른바 文明人들의 異色趣味의 對象이 될수있는 未開한 땅이니까 그들의興味는 過히나뿌지않을것이다
더욱이 崔承喜의 戱畵化手法이 西洋人의 그것에 比할만한 지경에 이르고보매 더욱 拍手를 살것이라고 推測된다.
萬 어떤外國人이 조선옷을 입고박인 自己의寫眞을 조선이란 선성도못들은 自國人에게 보인다면 그들은 누구나 자미와 웃음을함께하여 볼것이다.
卽 조선인이란 어떤화상들일가를 聯想하는 趣味도 있을것이오 또 文明人에 比하야 懸隔한 落差를 보이는外貌와 衣裳에 輕蔑的 異色趣味와 異國情調를 느끼기도 할것이다.
舞踊使節 崔承喜는 歐米公演을 通하야 마라손의 孫基禎만치나 조선을 소개하고 높이리라하지만, 그소개란 우에서 말한것과같은 效果를 남김에 지나지않은것을 우리는 疑心치 않는다 그가 萬一 歐米의 劇場을 떠들석하게 하였다해서 그것으로 그게 조선을 소개하엿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의 獨斷이오 妄想일것이다.
舞踊의 本고장인歐米에서는 아무려나 그의 舞踊은 遜色을免치못할 아니 그리하야 必然的으로 구미인의 눈에 새로운 조선줌, 未開地의 춤을 적지않게 끼이게될것이나, 참말 조선을소개하랴면 무엇보다 조선의숭내를 넘어서 조선의眞實을 捕捉하는 根本的인 用意와 鍊磨를 가저야할것이다.
우리는 이따금 조선의舊劇을 본다. 그리하여 조선소리도 듯고 춤도본다. 어쩐지 新劇이나 洋樂이나 舞踊보다 하찮게보이는것이 事實이다.
심하면 그렇게 生覺지않으므로 해서 저自身이 時代■가 되는것으로 역이는 傾向조차 있다.
그러나 실상인즉 우리는 조선춤이나 舊樂에서 보다 속깊이 마치는것이 있음을 느끼는것이다.
거기에는 많으나 적으나 우리가 呼吸하는 조선的인 旋律과 湝調가있기때문이오 오랜 핏줄의 紐帶가 있기때문이다. 또 그藝術에서는 生活과 藝術精神이 乖離하지않고 緊密히 合致되여 있기때문에 비록 그藝術이 低及的의 것이라할지라도 보고듣고 사람에게 깊은實感과 交感을 주는것이다.
그리고 舊劇에 나오는 광대나 기생도 新劇의俳優보다 格이떠러저 보이나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노래나 춤이 新劇의 그것보다 가슴에 떠러지는深度가다르다.
조선의 生活中에서 이루어진 藝術은 누구보다도 조선인을 붓잡는 生理的, 感覺的 깊은 뿌리를가지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또하나는 다만 이것뿐이아니라 演奏하는 그들의 態度에도 있다
勿論 어느나라 어느곳에도 低俗 추잡한 날당패는 없을수없는것이지만 그래도 따로 그들에게서도 眞率한 態度를 發見할수 있는것이다.
장돌뱅이에게 있어서는 장타령이 곧 生活그것이다.
조선춤, 가령 劍舞나 僧舞같은것을 보라. 잘하거나 못하거나 그들은 眞率한態度로 힘껏은 自己의領分을 나타내랴 하지안는가. 거기에는 決코조선의춤을 숭내내랴는 故意도 오만한 不謹愼는 없는것이다.
卽 우리의 빛나는 舞踊使節 崔承喜가 자랑스러운 文明人의 舞踊技術을 가지고, 氣分을 榮譽로운 中天에두고 未開한 조선의 춤을 숭내내는듯한 그러한 假作과 不眞實이없다. 또는 野蠻人의 춤을 숭내내는 戱畵的 餘興的인 그러한氣分도 없다.
舞踊은 恒常氣分과 動作의統一을 要求하는 藝術이니만치 안에 不謹實한態度와 氣分을 가지고 있으면 있는니만치 그動作과 表現도 自然거게따라가지고 있으면있는니만치 그動作과 表現도 自然거게따라가지 않을수업는 것이다.
그런데 觀衆은 決코 動作만을 봄으로서 滿足치안는것이다.
動作을 보는눈이 높아간다는것는 곧 그動作의 뒤여있는 內的인 動因을 보는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참말 어떤것인지를 아려고하는 本能을 그들은 가지고있다. 그러므로 觀衆은 눈으로뿐 섯■타 마음으로써 그表面의動作과는 다른 어떤 內因을알려고 애쓴다. 卽 單純한 外的인것과는 다른 內的인것을 알려고한다. 그리하여 그內的인것이 眞實을缺한 假作인 것을 發見할때, 그의 動作은 아무價値도 업는것이 될것이니 그러무로 아무리 能熟한技術을 가젔다손치더라도 그것은 究竟 실없은 遊戱나 餘興에 지나지않는것이다.
崔承喜는 우선 조선춤을 추는 그態度와 氣分을 고처야 할것이다. 그의 조선춤에 있어서는 特히 눈이 重要한 『役割』을 하는모양인데 그것은 마치 파란 눈동자를가진 西洋人(文明人)이 검은 눈동자를 가진 東洋人(未開人)의 視力을 試驗해보는 때와같이 마뜩지않게 빛나는 것이다. 그는 언제든지 觀衆을 向하야 『앙궁!』하는 態度로 조선춤을 추지않는가.
또 그것은 다만 觀衆을向하야 그럴뿐아니라 自己가 추는 조선춤을 輕蔑하고 히롱하기 위하여서하는 버릇이기도 하다. 文明人이 萬一餘興場에서 心魂을 다하야 未開人의 춤을춘다면 輕薄低級한 觀衆은 『빠가마지메』라고 부를것을 崔承喜는 잘알고있는모양이다. 그래서 늘 조선춤에 있어서만은 遊戱의 心境과 巧智를 잇지않는것이다.
流行的인 藝人은 한개의 眞實한 藝術鑑賞家을 보는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輕妄 低俗 無知한 觀衆을 알뿐이다. 崔承喜는 이것을 아는데 있어서 인재 아주 賢明하여진 모양이다.
그러나 그賢明은 奈落으로 通하는길을 自己의 길로 보는 賢明일뿐이다.
觀衆은 어리석은듯하나 실상은 영리한것이다. 觀衆은 流行的인 藝術만을 理解하고 좋아한다고 생각는것은 文化가 低級한 社會에서 만 들을수있는 말이오 민중의 속깊이 숨어있는 感受性에 對한 認識不足者의 입에서만 可能한말이다.
論보다 證據로 觀衆은 崔承喜의 조선춤보다 그의 本格的인 舞踊에對하야 絶大한歡呼를 보냇지않었는가.
그의 멫개의 作品은 實로 그의놀라운 天分을 말하는것이었다. 그는 힘의 藝術가요 뿐만아니라 含蓄된 여네지가 안으로부터 밖으로 솟아올라서 立體的인 技巧우에 實로 따이나미크한 애숀을 그리는것이다. 이때觀衆은 그어느때보다도 絶大한拍手를 보냈으니 이것은 觀衆의內面에 低劣한 藝術보다 本格的인 藝術을 肉身으로서 理解하고 呼吸하는 素質이 숨어있다는 것을 證左하는것이니 崔承喜는 果然 여기서 배우고 깨닫는것이 없을가.
低級한 舞踊에 隧하는 디렛탄티즘을 훨씬넘어서 藝術의 眞髓로 突進하는 衝動과反省을 여기서 배이지못하고 말것인가.
끝으로 誤解를 避하기위하야 한마디 附言할것은 이小論의 內容이 決코 조선춤을 그대로 추라는것을 말함이 아니라는것이다. 우리는 勿論 조선춤의 現代化를 바라는者이다.
두말할것 없이 舞踊도 다른 文化와같이 民族性과 아울러 世界性을 가저서야만 비로소 存續‧ 發展이 可能한것이다. 藝術의 民族性만을 부르짖는것은 그藝術을 發展시기는것이 되지못할뿐아니라 되려 滅亡시기는것이된다.
그런데 공교히 때가 不幸이 藝術의民族性 ‧ 跛行性만이 特히 高調되는 때이다 앞으로 期를달리하야 文化의 世界性과 民族性에 對한工夫를 해보고싶거니와 여기서 우선 이小感과 관련되는 若干을 말하고저한다.
藝術이 個性的 色彩를 가지는것과같이 民族的傾向을 띠는것은 가릴수없는 事實이다. 民族이 發達하고 民族的特殊性이 서로갈리여 있는以上 이것은 當然한 現勢로 나타나는 現象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거듭잊어서 안될것은 藝術文化의 世界性이다. 조선의文化는 支那나 日本내지의 그것을 떠나서 생각할수없는것이며 日本內地나 支那의 文化는 또한 印度나 퉁구스나 印度支那나 네그터드나 인도네시아나 其他 諸外國의 文化를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것이다.爾餘의 다른나라 文化도 亦是 理는 한가지다.
文化는 實로 이와같이 民族的인同時에 國際的인 運命을 첨부터 가지고있었는데 이對立된 民族性과 世界性이 그文化自體中 가장 잘 統一된것은 루넷쌍쓰以後였고 그矛盾對立이 가장 甚한것은 오늘날일것이다.
어떤 限界를固守하랴는 民族의 槪念과는 反對로 그産業이 市場擴大의 必要와 交通運輸의 發達로 말미아마 國際的으로 나아가지 않을수 없는것같이 文化도 민족의 槪念과는反對로 그것을넘어 국제적으로 發展하랴고하는 國際的滋養을 攝取하랴는 本能을 그體質로 하는것이다.
뿐만아니라 민족도 국제性을 가지고잇는것이다. 그런데 今日은 민족과 文化속에서 이 국제性. 世界性을 全然 追放하랴고하니 이것은 말하자면 停滯에의 踏步요 窮極에있어서 死滅에의 逆行이된다할것이다.
붓끝이 좀 널리 擴散된感이있으니 要컨데 조선의 藝術을 살리고 發展시기랴면 이러한逆行의 潮流을 허치고 그本來의 生理를 保全하지않으면 안될것이다.
傳統이 없는 조선의藝術은 지금겨우 萌芽期에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잘 키우랴면 거게 不斷이 世界性을 賦與해야 할것이다. 이것이없는 貧血의藝術은 우리에게 窒息을 보여줄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藝術은 모름직이 이땅의 雨露속에서 生하야 세게의大氣를 呼吸하는데서 비로소 그것이 한개 동떠러진것이 되지않고 세게藝術全體의 一環으로 그特質을 나타낼것이라믿으며 또 여기서만 우리는 우리들의 藝術의未來를 期待할수있을것이다.
함으로 우리는 決코 한개의 藝術家 崔承喜에게 조선춤을 그대로 추어달라는 퉁명스런 注文을 하지는안는다 그의말대로 『조선춤의 特色을 버리지않고 西洋춤의 長處를取하예 新境地를 開拓』하여 주기를 바라는바다.
그러나 上述한 바와같은 그러한 態度와精神으로는 참다운 조선춤의 特色을 살릴수 없음은 勿論 국제化할수는 더욱 없다. 우리는 前日 朝鮮日報主催의 民俗藝術의 公演을 보았거니와 그것은 一部有志나 民俗學者의 宣揚과 培養으로 다시 開花되리라고는 믿지안는다.
어떤 藝術이고 그것이 민족藝術로 오랜生命을 保特하기 爲하여서는 實로 文化本來의 세게性의吸收와 同化作用이 絶對 必要한것이다.
이것은 다만 오늘의 藝術使節 崔承喜에게만 보내는 말이아니라 實로 우리들 藝術의徒 全般에 한글같이 要求되는 問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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