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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려―나와 현금―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나의 반려―나와 현금― 나의 伴侶―나와 玄琴―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장인식 張寅湜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41-04 昭和十六年四月
면    수 262 262
기사
玄琴은 至今으로부터 約一千五百年前, 高句麗時에 王山岳의 創作한 것으로 爾來 宮中祭禮及宴禮에 使用할뿐아니라 民間에서도 널리使用되고있는 樂器입니다.
이 樂器를 創作한 動機가 傳說로 傳해지는데 이것을 紹介하여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新羅古記에 傳하는것인데 晋나라에서 七絃琴을 高句麗에 보냈는데, 우리 高句麗에서는 그것이 樂器인것만은 짐작하나 그 聲音이라던 演奏하는法은 全然 解得할道理가없어 賞金을걸고 能히 그樂器의音調를알고 演奏할수있는者를 왼나라에 廣布하게 되었드랍니다.
그때 第二相 王山岳이 그 本樣을 그대로두고 그製方과 形式을 改良하야 오늘의 玄琴을 製作하고 다시 그樂器에 適當한曲을 百餘曲이나지어 演奏하였더니 그소리가 매우 美妙嶄絶하며 玄鶴이날려와 춤을추었다는것입니다. 까닭에 그일홈을 玄鶴琴이라하였는데 後에는 中間의 鶴字는略하여 但只 玄琴이라하여오늘에 일은것입니다.
이제 좀더 玄琴이 어떠한 曲折을가주고 遺來하였는가를 이야기하여보겠습니다. 王山岳이 創作하여 얼마가지난後 新羅사람의 王寶高가 地理山 雲上院에 들어가 學琴 五十年에 또한 作曲까지 三十餘曲이나하여 得이라는 그弟子에게 傳하고 得은 이를 또 貴金先生에 傳했는데 이 貴金先生亦是 地理山에 들어가 나오지않음으로 羅王이 琴道의 斷絶을 크게 憂慮하야 伊飡允興에게 南原公事를 맞기고 貴金先生의音을 傳得하려하였습니다.
允興이 到宮하야 安長․淸長이라는 聰明少年二人을 簡擇하야 山中에 들어가 배호게하니 先生이 거의 傳授하되 그隱微한것은 傳치않거늘 允興이 그夫人과더부러貴金先生에게 나아가
「吾王이 나를 南原에 보내심은 先生의 神技를 傳하자 하심이었는데 于今三年에 이르도록 先生이 秘藏하시고 傳하지않으시니 돌아가 무어라 復命할수있겠습니까.」
하고 允興은 捧酒하고 그夫人은 盞을들어 禮를精誠을다했더니 先生이 비로소 飄風等三曲을 傳했습니다.
그後에 安長은 그아들 克相, 克宗에게 전하고 克宗은 다시 七曲을 作曲하였고 克宗以後에는 玄琴으로서 業을삼는者가 一二人에 끄치지아니하였습니다.
玄琴에는 두가지 調가있는데 그하나는 平調요, 그하나는 羽調인데 모두 百八十七曲이요 그餘聲遺曲은 流傳된것이 얼마있는外에는 散逸되였다합니다.
王寶高의 作曲한 三十曲은 아래와같습니다.
上院曲一 中院曲一 下院曲一 南海曲二 倚喦曲一 老人曲七 竹庵曲二 玄合曲一 春朝曲一 秋夕曲一 吾沙息曲 鴛鴦曲一 遠岵曲六 比目曲一 人實相曲一 幽谷淸聲曲 降天聲曲一
그以後 玄琴의 曲調로서 異色인것을 하나 말슴하여보겠습니다.
新羅慈悲王時 어떠한사람이 甚히 가난하야 衣服의百結이懸鶉과같음으로 사람들이 百結先生이라 불렀습니다 이百結先生은 恒常 玄琴을 좋와하야 喜․怒․哀․歡을 玄琴으로서 표현하드랍니다. 어느해 歲暮의일인데 이웃에서 떡방아찟는소리를들은 그의夫人이 歎息하면서 하는말이 「우리는 무얼로 過歲하여야 옳은가요」하니 先生이 對答하여일으되 「生死는命이있고 富貴도하날에있는것이니 運이오면 받을것이오, 運이가면 道理가 없는것이니 무어 그리傷心할것이있오」하고 玄琴으로서 방아찟는소리를 描寫하야 慰安하였더니 이말이 世上에傳하야 이樂을 碓樂이라하였습니다.
玄琴의制度는 前面은 桐木으로쓰고 桐木에서도 石上桐이 最好나 石上桐이 아니라도 또한 無妨합니다. 後面은 栗木을使用합니다.
絃數가 六絃으로 伽倻琴이나 그런거와같이 雁足을 쓰지않고 이것은 十六의棵를 固定한 位置에 붙었습니다.
玄琴의 特徵은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枚擧할겨를이없스나, 그中에도 特出한것으로 그널분 音量을 말할수있고, 이樂器처럼, 演技者의 技術을 無限大히 發揮할수있는것等을 들수있습니다.
玄琴의 紹介가 너모 支離한感이없지않으나, 編輯者의 주신 「나의玄琴」대로, 아즉 一家를 일웠다고 自信할수없는 나를 長遑히 쓴다는것도 그닥지 내키지않어 玄琴의 紹介가 길어젔습니다.
다음은 아조 簡單히 自己와 玄琴의 因緣이야기를 記錄하여보겠습니다.
自己가 普成高等普通學校를 中途退學하고 李王職雅樂部에 入部한 것은 大正十一年이었나 봅니다.
當時의 雅樂部는 오늘과달러 그職員數爻만도 百數十을 헤였고, 雅樂師長에는 故明元璧先生 雅樂師에는 모다 뒷날 雅樂師長을 歷任한 金寗濟, 咸和鎭先生이게섰고, 雅樂手長陣도 崔渟永, 劉儀錫, 安德秀, 李壽卿氏等 濟濟한것이였습니다.
雅樂部의機構란 그런것도, 次츰, 舊骸를벗고, 新時代에 適應하야 多方面으로 廢棄와建設이 無常한 일은바 過渡期인것이었습니다.
世襲으로 職員의子弟가 그業을있든것을 비로소 一般에서 學生을 公募하야 後繼者를 養成하기 第二期生에 자기는 加擔하였습니다.
처음 第一, 第二年은 一般이 다함께 修得할 樂科를 共通히 배우고, 第三年서부터 專攻別로 特殊한 樂器部門에 들어가게되는 制度가있는데, 自己는 同期에서는 單獨히 玄琴에 專攻하게되었습니다.
一技一藝에 能秀하랴면 그苦心이 큰것은 말할것까지도 없는일이지만 別다른音樂의 天分이있는것도아님 自己의일이라, 進境이 볼것이 없었은듯 記億되나, 그럼에도不拘하고 나를 敎授하여주신 梧堂 咸和鎭先生은 여간 懇篤하고 叮嚀하시게 傳授하시는게아니었습니다. 自己의 오늘이있게한 恩師이신것으로 自己의平生에는 잊을수없는 분이십니다.
梧堂 咸和鎭先生은, 무어 玄琴만에 能通하시는게아니요 絃樂器全般에 그造詣가 놀나우신 분이나, 그래도 絃樂은 先生의 專攻樂器인지라, 무엇보다도 卓越하신 技藝의하나이었습니다. [사진] 장인식인 듯.
그簡嚴하고 神妙한彈法은 王山岳以後 著出한 玄琴의 演奏家에 列하여 遜色이없으시겠다 느껴젔습니다.
다음으로 松史 李壽卿先生의 敎導亦是自己는 어느때고 잊을수없는것입니다. 梧堂先生의 簡潔하고 雅致있는 彈法과는 또한 달러 松史先生의 琴法은 壯重하고 豪放하여 좋은 對照이었습니다.
李壽卿先生은 重光之曲(靈山會相)에 더욱 長하신데 이것은 梧堂先生도, 늘 重光之曲은 松史先生의 彈法을 留心하라 일으시는것이었습니다.
自己는 百樂의 으뚬되는 玄琴을 專攻하게되여 一方畏懼하고도 內心 得意가 없지않은데다, 더욱 그스승에있어서, 이토록 훌륭하신 先生에 學琴하게된것을 자랑으로 아니역일수없습니다.
그러나 아즉도, 나의 技量이 이先生들의 일흠을 더욱 빛나게하지못하는것은 죄송스럽기 끝이없는일입니다.
上記 두분先生은 오늘날 모든 雅樂部를 勇退하시여 悠々自適에 閑日月을 보내시는데, 지난날의 不敏한 琴生은 玄琴科敎授로 後進을 培養함에까지 박귀었습니다.
藝道의 精進이 限度가 없는것은알면서도 自己가 이것으로 大成할날이 있을까를 省思하여보기도 가끔입니다.
사람에게 琴道를 傳授하게되면서부터 自己는 더욱더 玄琴의길이 어려운길인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사람있어 나에게 玄琴의 妙濟를 묻는다고하면, 나는 서슴지않고, 玄琴은 그技術보다도 그人格이로다 對答하기를 주저하지않겠습니다.
朝鮮雅樂이 그러하지만, 玄琴의彈法을 보면 그爲人됨을 넝넉히 짐작된다하는것이 古老의 말슴이십니다.
이즘, 玄琴이 絃樂器中에도 王者이오하니까, 己徃 雅樂을 해보면 玄琴을 하여보겠다는 好奇心으로 玄琴을 崇尙하는것같으나 이것같이 愚昧한 生覺은 없는줄압니다.
흔히 正樂이니 正律이니하고 玄琴으로의 音調를 귀에하는데, 別々 淺착한 弄結과 雅正하달 수없는 彈法이 많은것은 우리의 자랑할 玄琴을위하여 遺憾이라하겠습니다.
참으로 自己가 처음 玄琴을 만지기始作하여서 現今의 朝鮮音樂界의 狀况을보면 十年一昔이 두번이나 되더라도 隔世의感이 不無합니다.
一般社會의 朝鮮音樂에對한 理解랄지 認識도 내가 처음 雅樂에 從事할때보다는 여간 深厚하여진것이아니오 따라서 樂人의 素質과 人格도 매우 向上된것은 즐겁습니다.
歷史的인 우리의 固有한 樂器 玄琴을 어떻게 더 우리에 가까운 樂器가되게하느냐는 問題가있으나, 他日로 밀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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