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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려―나와 대금―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나의 반려―나와 대금― 나의 伴侶―나와 大笒―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김계선 金桂善
출처정보 조광 朝光
연    도 1941-04 昭和十六年四月
면    수 258 258
기사
나는 明治二十四年 舊曆으로 三月三日 金德化의 長男으로 漢陽에 出生하였습니다. 父親의 代만하더라도 그렇지않든 家勢가 내가 世上에 나오기 前後하여는 매우 零落하야 寒微하기 짝이없는 境況이였습니다.
當時의 幼少들이 누구나 다그러하듯이 書堂에 千字文을 끼고 드나든것이었으나, 貧乏하기 마련없는 집안의經濟는 그것나마 오래 지탱하지못하고 말었습니다.
어리다고는 하여도, 허는 所業없이 펀둥펀둥 집안에 들어박혀 作亂이나치고 노는 것이 안되였든지, 이웃에 사는 父親의 親知에 그때 兼內吹에 出仕하던 韓某라는 어른이, 마츰 營門에서 樂手見習을 十八名이나 募集하니 이機會에 한번應하여봄이 어떠냐고 慫慂하는것이었습니다.
철없는 自己야 別다른 生覺을 가저볼나이도 아니기야 하였지만, 그렇게 큰 期侍도 없는代身, 무어 그리 싫은마음도 없은것이나, 집안에서는 窘塞한 살림에 보탬이라도 있을까 그한가지 바램에, 十四歲少年은 內吹都家大廳에 적은머리를 조아린것이었습니다.
까다로운 考試가 있는것도 아니요, 應募者가 過多한것도 아니라서 內營兼內吹에는 쉽사리 뽑힐수가 있었습니다.
暫間 內吹가 무엇인가를 말슴디리면, 서울안 六營門에는 다各其 그에 附屬한 吹樂隊가 있든것이었습니다. 마치 오늘의軍隊와 恰似한것입니다.
그러든 여섯營門의 內吹들이 모다 營門閉鎖와함께 解散되고 그數爻도 무척 줄어들어 數十의樂手가 僅僅內營에 附屬하여 그內營兼內吹만이 殘在한것이었습니다.
그內營兼內吹都家는 只今鍾路一丁目 角田洋服店뒤 예전 相思洞에 있었습니다.
그때 自己가 修業해야할 樂器가 大笒으로 先生에게서 指示되여 爾來四十年이나 일은것입니다. [사진] 김계선인 듯.
大笒이 新羅三竹의 하나로 中笒, 小芩이 또한 自在한것은 아시는 일이지만, 大笒을 專攻한다하여도, 첫날부터 大笒에着手함이 아니요, 그보다 尺長 若干 짤르고 指孔사이도 매우 가까운 中笒을 얼마 能熟한뒤에 비로소 배우는것인데 自己도 처음은 中笒을 이켰습니다.
이와 前後하여 나는 宮內府掌樂院에 出仕하시던 當代 大笒으로는 比肩할이없는 最高峰 崔鶴鳳先生에게 個人敎授를 받는 便宜를 얻게되었습니다.
배우는이에게있어 어진 좋은 스승을 만나는것같이 즐겁고 幸福한일이 없는것인데, 斯界에 出發에서부터 이렇듯 恩惠받었다는 것은 眞實로 感謝로운 일이라고아니할수없습니다.
그보다도 여러 가지 事情으로 內營의 兼內吹까지도 閉門의 悲境에 일으러 入所하여 二年만에 罷해버렸는데 自己와 몇몇만이 運좋게 掌樂院에 就職하게된 것은 이또한 보이지안는 힘의 加護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明治三十九年 十一月, 音樂에 從事하랴이면 누구나 울어보는 宮內府掌樂院에 自己도 사람과 어깨를 겻고 드나들게되든때의 스물도못된 十六歲少年의 得意는 只今도리켜 生覺해도 즐거운것입니다.
더욱 尊敬하는 스승 崔鶴鳳先生 門下에서 一意 一管大笒을 硏鑽하게되는 幸福을 갖게된 것은 어떻게 큰 기쁨이였겠습니까.
嫉視, 反目, 派閥도있고하야 崔鶴鳳先生의 評判은 그의 大笒의技와는 매우 距離가있었으나 弟子들에 對하는 先生은 어디까지 嚴格하시고 親切하신 尊敬할 어른이었습니다.
門下에는 나以外에도 여럿이 先生의敎授를 입었지만 中에도 自己는 누구보다도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그에따라 同僚의 미움도 免할수 없는 것은 自然의理라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先生의 偏愛라기보다, 쉬지않고, 하려고 努力하는 나의 根氣있는 熱誠을 조금 보아주신것이라고 生覺하고 조금도 慢心을 갖지않었습니다.
恩師 崔鶴鳳先生에 對한 이야기는 自己에게있어 모도 生生한 記憶이요, 거의肉親의情까지 푸군한것이나, 다른날로 미루고 樂器 「大笒」의 解說을 조금 하여보려고 합니다.
編輯하는이의 特別한 請이기도하여 물리치지못하고 써보는것이나 樂器大笒의 이야기는 나보다는 몇倍 高名하신 先生이 많을터인데 其實, 한 허잘것없는 그것의 演奏者에 不過하는 自己에게 맡기시는 眞意는 자못 不可解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대로 記錄하여보면 大笒은 新羅 神文王時의 創作으로 傳하는것입니다. 神文王은 新羅第三十一代 王이신대 在位十一, 二年인가 하섰습니다.
그런데 大笒을 神文王代의 製作이라고 하는 것은 新羅古記에 傳한다는 아래의 傳說에서 오는것입니다.
바로 神文王時에 東海 한가운데, 忽然 小山이 生起하였는데 形狀은 龜頭와 恰似하드랍니다. 그우에 一竿竹이 났는데 晝間에는 난호여 둘이되고, 夜間에는 合하야 하나가 되는故로 王이 奇異하다하고 사람으로하여금 잘르게하여 그것으로 笛을만들어 이름도 萬波息笛이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傳說이 비록 있으나 怪奇하여 可히 取하기 어렵다는 것을 羅古記스사로가 附言하였습니다.
이것으로써보면 大笒을 우의, 虛荒하다할 怪談에 빗그러매여 神文王時에 創作된것이라고 傳하는 것은 한쪽으로 생각하야 덜 符合하는것이나 더 確實한 憑據도 모자라는 이즘으론 于先 그런대로 滿足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思惟하는 것은 自己의 學究的으로는 매우 淺薄한 見解일뿐이요, 이런 대문은 달리 東洋音樂史의 權威에게 辭讓할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大笒을 筆頭로하는 三竹이 新羅에서 起源하여 高麗, 李朝, 現代 이렇게 오늘까지 傳來한것만은 疑心할 수 없는 歷歷한 事實이겠습니다.
翰林別曲인가하는 歌調에 管絃 자즈러진 音樂의 陶醉境을 그린 대목에 最終句를
(一枝紅의 빗근笛ㅅ吹, 一枝紅의 빗근笛ㅅ吹, 過夜景긔어떠하니잇고.)
하였습니다.
高麗朝에서도 大笒이 어떻게 重要한 樂器이였다는것을 잘 說明하여주는것으로 注目할것이 있습니다.
李朝에 있어서도 第七代王 世祖大王이 伽倻琴과 아울러 大笒을 善吹하섰다는것은 너무도 大笒의 眞價를 빛내는것입니다.
나의스승 崔鶴鳳先生의 一敵國으로, 名笒 鄭若大先生이 게섰는데, 鄭先生은 그第一步부터 사람과 相異하야 每樣仁旺山에 登山하야 大笒을 吹奏하기 무릇 十年에 大成한 非凡한 어른이었습니다.
흔히 大笒에 善手되는 別다른 秘傳이라도 있는것처럼, 自己에게도 그 善吹하는 妙諦의 指示를 바라는 분이 없지도않은데 나는 그럴때마다 많이 부는道理以外 딴아무것도 없다고 일릅니다.
世評에 쫓으면 自己도 무쳑 天稟에 得을하고있는 모양인데 아모리 도리켜 생각해도 내게 音樂的特性이 남유달리 지녔은 것은 풀어낼 수 없습니다.
내세운다면, 누가 뭇더라도 가볍게 선선히 對答할수있는 것은, 그러고 소리치고 자랑이라도 할것이 있다면 남의곱(倍), 아니 몇十倍, 더많이 大笒을 불었다고하는것뿐입니다.
그밖에 아모것도 없습니다.
꿈에라고 내가 남에게 뛰여날, 타고난 特別한 資質이 있었다고는 마음도 먹어보지않었습니다.
「난 才分이없으니까.」 「音樂은 藝術이니까 그런素賀이라야지.」
눈물나는 精進도없이 諦念해 버리고, 凡俗한 境界에 주저앉어 妥協해버리는 젊은 樂人들의 무쳑 맘便한 態度에 마닥디리면, 時勢이니까 어쩌는수없지 하다가도 매우 안타갑습니다.
音樂에 大成하는 條件으로 生活의裕餘를 울부짖고, 그럼으로야 비로소 그길에 敢然히 邁進할 수가 있을 듯이 慷慨하는 後進도 있습니다.
自負하는 것이 아니나, 내가 여기까지 걸어온길은, 오늘의 우리의 後輩가 것는길 數百倍의 苦難의 길이었습니다.
살림의 窮乏은 처들지 말고라도, 그 蔑視, 冷侍, 汚辱의 環境에서 優遇라고는 말할수 없더라도 제법 安定한 自己의 現今位置에 想到할때 참는것만이 貴한것이로구나하고 깨달은것같이 느끼는것은 제법 느긋한 心境의 하나입니다.
管樂은 四十이 命數이니, 五十이 그러니하고 大笒도 四, 五十이면, 볼일 다본듯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그사람의 마음먹기에 있지않은가하고 싶습니다.
그야, 體質과 먼저 議論한後가아니면 가볍게 斷定하기 어려우나 나의信條는 불수있을때까지는 大笒불기를 놓지않으리라하고 있습니다.
輕하달수없는 持病의 神經痛이 늘 걱정이나 當分은 매우 健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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