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문헌
검색 > 문헌 > 기사
반도극계의 소하담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반도극계의 소하담 半島劇界의消夏談
종    류 비평 批評
필    자 현철 玄哲
출처정보 신민 新民
연    도 1927-08 昭和二年八月
면    수 82 [82]
기사
一, 劇界의來歷이야기를
오래간만, 여러해동안을 벨느고 벨느던 日本寶塚歌劇壇을 求景도할兼 硏究도좀해볼가하고 날準備에 奔走한통에 하로는電車길에서 偶然이 新民社의 獨鵑兄을만나게되엿다. 반가운人事가나자 八月號新民에 半島劇界에對한 來歷的縱貫橫流를 하나써주지안켓는가? 하는말이잇섯다. 原來로조와하는 演劇의말이라 안이 엇지고할餘暇도업시 承諾을햇다. 그리자 數三日後에 獨鵑兄이 原稿紙를가지고 朝鮮劇場事務室로 차자와서 挽近으로 생긴朝鮮演劇의 繼統的經路를적어달나고다시 付托이잇섯다. 筆者亦是 餘暇가 잇스면 이러한것을 하나記錄하여둘나고 생각한지가 오래이고 한번 써보와스면도 한것이라 그러케 한번試驗을 할가하엿다. 첫번에붓을들는 多少의企待도업지안이하엿고 拙筆이나마 後日의參考가 톡々이될것을 만들야고하엿지만은 於是乎붓을들고보니 가느니오느니하여 글ㅅ字한字쓸수업시 그양日本으로나게되엿다. 寶塚지와서 從容한틈을 타서 야긋々々써볼가하엿더니 한이것저것바中에 日氣가더워서 숨이턱々차는이통에 到底히 글다운글이나오지도 안이하려니와讀者여러분도 이러한더위에 硏究的이나 參考的글이그처름必要치안이할가하여 처음에 豫想한것을돌여서 山골에흘느는 물 가티 슬々々々지나가는 이야기를 暫間々々거처써보기로하엿다. 別다으는參考가될것은안이나 常識的으로 朝鮮劇의最近에발바온길을 大綱々々알아만두시는것도 或時는이야리가되지 안을가하여······다시말을이여······ 「윈」의進化學說이 現代의科學으로써 이것을否認하지안는다하면 오늘날 우리가사라오는 이社會에 存在해잇는 모든것은 무엇이던지 반다시 所用이잇서 發達이되고 繼續이되여잇는것이라고 생각할수잇는것이니 演劇이라고하는 그것도 萬一에 무슨所用이 업섯다고하면 오늘날지우리사람社會에 남아잇슬理가 萬無한것이다. 演劇이生物과달나 自力으로 生長해가지안는以上 이를助長식키는 그내의胸中에는 무엇인지 한가지식必要가잇슬것이고 는이를鑑賞하는 그사람들도 거긔에무엇이잇서 鑑賞할야고하는것도 우리는넘어나仔細히알게되는것이다.
民族의歷史를들치고보와서 世界에 어한民族을말할것업시 程度가놉거나 낫거나 發達이야되엿던말든 歷史的으로 演劇이잇는것은 누구나다 잘알기쉬운 事實이다. 그러나 世界的으로보와 남만못하지안이한 歷史를가지고 남만못하지안이한 文化를가진民族이 歷史的으로演劇을가지지못한것은 참으로異常스러운일이라고 하지안을수가 업는것이다. 이러한點에잇서々 우리가한번생각할것은 지내온우리民族의生活狀態와劇的內容의生脈을 對照해볼것가트면 비록 오늘날 우리文獻에 나타난것이업다고하더래도 어한時期에는演劇의싹이 반다시 잇섯슬것이고 어한時期에와서 이것이사라진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잇는것이다. 그러나 只今의우리가이러한條件으로歷史的考察을한다는것은그만두고도 最近李朝에이르러 劇的으로 어한 施設이업섯던것도 그當時의 生活狀態나 는政治的方向으로보와 그럴하게推測할수가잇는것이다. 그러치만은 封建時代를버서나 世界的文化의交流時代인오늘날안자서 人生生活에 一種의有機體인 演劇그自體가 달은文化에對해서 比較的發達이 느진것은 結局여긔에 對한一般의努力이업다고 看做할수박게업는것이다. 劇과가티 多數의民衆을相對하는그런것으로 한사람의힘만은不能할素質를갓고써 內外가相對的이고 統一的이며 集合的인 그만치 團體的訓鍊과 統一的努力과 集合的奮鬪가업고는안이될것이다. 그러나 事實인즉 그만한그무엇을가지지못한닭에 依然이 우리社會에는 演劇이업다고하여도別로異論이업슬만치 된것은 참으로痛歎할일이라하지안을수업는것이다.
二, 最近의朝鮮劇
歷史的으로 參考가될만한 演劇이야기는뒷날에다시한번할야고하고 가장가운부터말을할것가트면 우리도새로운文化를밧게된以後로 한무리의선뷔들가운데 演劇에對한運動을 한일이 決코업섯다고는할수업섯든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자라날길을엇지못하고 그양사라진것은 그네들의努力이 적엇다고하는것보다도 는 그를相對하는 民衆의理解가업섯다고하는것보다도 그네들의劇的內容을理解치못하는것이 큰原因이되엿다고 하지안을수가업는것이다. 勿論 여러가지藝術 가운데도 劇과가티 綜合的藝術은 한사람의혼자힘으로 이것을키우기가어려운것임으로 여러사람의共同努力을가져야할 만안이라 恒常經濟的問題가라단이기문에 簡單이이것을엇더타고말할수업다고할지라도 조금더努力이必要하엿슬것은 事實이라고하지안을수가업섯든것이다. 만은사람을相對하는 演劇事業이 하나는經濟的으로 하나는 內容的으로倂行하지안코는決코將來를바라볼수업는것이다. 這間三十年을內外한 所謂朝鮮劇界가 進步한다는것은그만두고 날로退步된것은 斷的으로經濟的破滅이라고도할수업는것이요 하나는 努力의不足으로만으로도 볼수가업는것이엿다. 그中에는劇으로하여 數萬의金錢을消費한일도잇섯고 는多大한努力을 犧牲한사람이 全然히업섯다고 할수도업는것이엿다. 그러치만은 金錢을消費한 그만한効力도 나타남이하나도업고 精力을虛費한 그만한實地도한업는것은 로或은이두가지가 倂行하지못한닭이라고하지안을수가 업는것이다. 劇에忠實한人士가 우리朝鮮에 그처럼업다고 하더래도 그래도모도 合하면 三四人은될것이니 이분네들이 共同合致하여 同一線上에 盡力하엿더면 或은異樣의發展을보와슬는지 모를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各家分立하엿다고하는것보다도 全然한 別立으로 或은 隱退하며 或은斷念하여 그나마 所謂先輩라고하는그분네가 하나도 共同點을發見하지못하는닭은 아모리무엇하는힘이잇다하고하더래도 좀처럼 朝鮮劇界에 黎明期가 도라오기는 實로遙遠한것이라안이할수업는것이다
三, 趙大臣의片談
筆者가 日本서 처음으로 朝鮮에나와슬에 劇界形便을 알기爲하여 여러方面으로 수소문한結果 雲汀金井鎭君과한가지 兪星溶公의紹介로 只今은임의 故人이된 子爵趙重應公을 그私邸로 찻게되엿다. 이는當時에 가장新智識을가진 當時要路의人物일만안이라 그以前에朝鮮劇界를爲하야 만은努力을한사람이라고하는닭에 趙子爵을訪問하기로 金君과決議를하고 가티가보게된것이다. 挽近에 우리朝鮮서 처음으로劇이야되엿던말든 劇場이야 劇場갓든말든何如튼 一定한場所에 一定한人員을 모라놋코 一定한料金을을밧아가며 구경을식키게한것은 그始初가 京城西小門안에잇든 圓覺社가 嚆失라고할수잇는것이엿다. 이圓覺社는原來가 劇場으로建築한것이안이고 韓國時代에 軍人將校의集會所로 建築한것이라고하나 그構造는羅馬中世紀의劇場비슷한 建築이엿다. 이것이所謂圓覺社이고 그團體의일홈으로는 協律社라고하여 只今도或-地方에서 도라단이는 唱夫派(광대패)의所謂舊劇이라고하는것이 協律社의일홈을 가지고도라단이는것은 그일홈이 이부터생긴것이다. 이 協律社는 어더케생겻는냐하면 韓國時代에 日本人伊藤博文公이 朝鮮에서 權利를 잡고잇슬에 伊藤公의主張으로 韓國의一國體面으로 演劇이업는것이 大段한差恥이니 政府에말을하여 韓國에演劇을 이르키는것이 좃타고함으로 趙大臣은 當時法府大臣으로 어한期會를어더 大臣會議時에 이말을提出한일이잇섯다고 한다. 여러大臣은 趙大臣의이말을듯고 大驚失色하여하는말이 以若法府大臣으로 이러한것을禁止할것인대 演劇起用云々은 千萬夢想박기라하여 介中에는책망하는이도잇고 介中에는 귀도기울니지안는사람도잇서 말을낸사람으로 無色하기가 이업게되여섯다. 할수업시이議論에失敗를當한趙大臣은 이事然을伊藤公에게말한즉 伊藤公이우스면서 그러면 내가 私錢을내여이일에着手를할것이니 당신이마타 일이成事되도록하여달나고 付托을함으로 趙大臣은卽時應諾을하고第一着手로 「마네쟈」될사람 卽監督될사람을養成할必要가잇서 各種으로物色한結果 光武와降熙年間에 新小說家로 「雉岳山」 「鬼의聲」等여러가지小說을쓴 菊初李仁稙公을選拔하여 日本東京에留學을식키게되엿다. 그런대 李公이 日本가서 演劇을硏究한것이안이라 中央新聞社에 들어가서 小說을硏究하여나와가지고 여러가지 小說은지은것이잇섯지마는 演劇에 對해서는 何等의所得이업섯던것이야 當時伊藤公이나 趙大臣이 알아슬理致가업섯다. 그러나 日本지브내여 演劇을 硏究해오라고한사람이 무엇을硏究하고왓던지間에 近二年이나 잇다가 硏究를마치고 나왓다하기에 인제는 韓國에도 무슨演劇이 새로나오는가보다하고 곳 伊藤公에게 이말을 하엿더니 公이돈을내여 圓覺社에 자리를定하고 韓國演劇을始作하게하엿다. 勿論이演劇의費用은 伊藤公의自出로 돈만잇고 나오는돈은 한푼도업섯다. 다시말하면 收支가맛지안이하고 費用이만이난모양인데 그것저것할것업시 趙大臣亦是 李公에게一任한以上에 內容에들어서는 干涉할必要도업섯고는內容을干涉할랴고 하여도 그것을알닭이업섯든것은事實일것이다. 돈이업다면 업다는그말만 伊藤公에傳하여 돈을어더줄이엿섯다. 그리하야 그럭저럭 半年이나 지난뒤에 하로는 伊藤公이 그演劇을한번가보겟다고함으로 趙大臣과가티 圓覺社에가본일이잇섯다. 伊藤公도 속으로는 무슨큰企待가잇섯던것이고 趙大臣도 어한조흔 演劇을하나하고 가서본즉 놀나지안을수업는것은 只今所謂舊派라고하는 광대소리로 春香歌이니 沈淸歌이니하여 背景도업고 扮裝도업시 소리판인지演劇판인지알수가업서 곳그냥도라왓다. 伊藤公도 그것이 演劇이라고할수업다하여 頗히 落膽한모양이고 趙大臣亦是 伊藤公에게對하여 面目이업게 되엿던것이다. 그리하여 伊藤公도 그後로는出錢을질겨하지 안이하고 趙大臣도 다시무엇이라고 말을할수업게되엿다 그래서 李氏에게 아주혼자맛타가지고 엇더케하던지 해보라고 내맥겻다고하는말을 趙子爵에게들엇다.
잘되나못되나 이것이 最近朝鮮에 演劇이란名稱을가지고 所謂識者가關係한最初의일이요 圓覺劇의起源이라고도할수잇는것이다. ······이것이엇케되여내려왓나 달아서하는이야기는다음號에······
-(七月二十二日寶塚歌劇本場地에서)-
이메일주소 무단 수집거부 권리침해신고 문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