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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리운 신부 시절―박영희 씨 서재에서―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아하, 그리운 신부 시절―박영희 씨 서재에서― 아하,그리운新婦時節―朴英熙氏書齋에서―
종    류 수기 手記
필    자 최승희 崔承喜
출처정보 삼천리 三千里
연    도 1938-10 昭和十三年十月
면    수 99 (99)
기사
★★★
[사진] 지금은멀니太平洋저쪽에이르러東方의藝術을白人에게자랑하고잇는崔承喜
昭和四年입니다 遠大한希望을 품고 故鄕에 도라온나를보고 어머님과 아버지는 무한히 기뻐하섰읍니다. 그런데 그것은 一個의舞踊家로서 도라온것을 기뻐하여주시는 오빠의 기쁨과는 달은것이였읍니다. 어머님과 아버지는-더욱히 어머님은 내가 朝鮮나온것은 舞踊을斷念하고 그만 싀집갈여고하는것인줄밋고 기뻐하신것이였읍니다. 그래서 내가오자마자 父母님께서는 候補者들의 寫眞을 연방 내들고선 싀집가기를 勸하섰읍니다.
하나 그런 意思가 조곰도없는 나로서는 그런이얘기에 귀를 기우리지도않은것은 勿論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너무도간절히 말슴하시는 어머님의말슴을 拒絶할수 없어서 맛선을 본일까지있었읍니다 이런일이있으면 있을수록 나의마음은 舞踊藝術硏究에로 끊임없이 달니고 있었읍니다.
「獨立하자 그래서 내自身의藝術을 樹立하자」 이런마음외엔 다른생각이 있을수없었읍니다.
結局오빠의힘써주신 德澤으로 硏究所가 될집을하나 마련했읍니다 硏究所를 세우고 看板을 써부첬드니 그래도 硏究生들이 하나 둘 뫃여와서한 十五名기량되였읍니다 그럭 저럭 자리를잡게 되였음으로 나는 더욱新鮮한 希望에 가득차 舞踊開拓의 第一步를 밟었읍니다 하나 그것도 한때뿐 날이가는사이에 物質的苦痛은 점점더해가서 내希望도하는수없이 주저안게되였읍니다 硏究生이十餘名이라해도 그全部가 月謝金을 내는것이아니고 그中 몇사람만 내였으니까 困難할 것은 事實이아니겠읍니까? 그래도 나는 月謝金밧고 못밧는 것은 問題도하지않고 오직 硏究에만 힘쓰고있었을뿐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生活費 용돈까지도 내호주머니에서 나오게 되었든것입니다 이렇게 困境에 이르게되매 誘惑의손길은 한두번이아니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그生活苦와經營難과 싸호면서라도 마음과 몸을 다-기우려하든舞踊藝術의神聖함을더럽히는 일이있어서는 안되겠다고決心하고 파트론 求婚 其밖게여러가지 誘惑을 물리쳤읍니다. 나는 어릴적부터封建的일지는 물나도 「心身의 純潔함을 잃고사는 것은 죽는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있었든까닭입니다. 나는 藝術的으로도 앞이 꽉맥힌듯싶은마음이였읍니다. 女子의 연약한손으로 적으나마 한개의硏究所를經營해나가지않으면 안된다는것도 確實히 어러운일이였지만 藝術의 막다른골목에 다은듯싶은 苦痛은 더말할수없이 나를 슲으게했읍니다. 이러는사이에 열아홉의봄을 마지하게되였읍니다. 經濟的苦痛, 藝術上煩憫 肉體的苦痛, 誘惑 이것들은 나로하여곰 直正한結婚을 생각하게만들었읍니다. 以前까지도 나는 훌융한 一個藝術家라고 自慢하고 있었든것이였읍니다마는 공부하고 硏究하여가는사이에 내藝術이 퍽으나 未熟함을 發見하지않을수없었읍니다 그와同時에 社會의억센물결을 헤치고 나갈여면 연약한 女子의몸으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것을 깨닷고 藝術上으로 生活上으로 훌융한 指導者가 있었으면 하는겻을 생각해보게되였읍니다. 나는 結婚하기를 決心하고 옵바에게 이事實을告白했읍니다. 오빠도 대찬성이였읍니다.
그런後 멫일을지나서 옵바는 훌융한 사람이있으니한번맛나보려느냐고 물었읍니다. 나는 오빠의말슴이기에당장그럴것을 對答했읍니다 그靑年을 맛나자고 約束한日字는닥처왔읍니다 나는 그날은 일부러 분도 바르지않고 집에서입든옷대로 評論家요 作家인 朴英熙氏書齋로옵바의뒤를따라갔읍니다 거기는 늘 그때의文學靑年들이 뫃여서 相互間의意見을 吐議하는 場所가되였든것입니다 그날도 내가 드러가니 朴英熙氏와 한靑年이 마조안저서 文學上의議論을 토론하고있었읍니다. 그이가 即 朴英熙氏와 오빠가내게 選擇해주신 安弼承氏였읍니다. 그의일홈은 一般으로 安漠이라고한다는것도 그날알었읍니다. 그날은 雜談으로 時間을 보내고 집으로 도라왔읍니다. 安은 當時 早稻田大學第一高等學院에 在學中이였읍니다. 그때가 바로 放學이라 歸省했든때였읍니다. 朝鮮에있어서는 그때 벌서 文學理論方面에 相當한 일홈을 알니고 月刊雜誌等에 빼지않고 執筆하여오는 新文學運動을하는 靑年이였읍니다. 그뒤 두어번 나는 오빠의許可아래서 安漠氏와 맛나는동안에 그의 綠이굵은얼골과어러운 議論만하려드는 그에게 情을 느끼게됐읍니다. 그리고 그의앞에 갓가히가면 가슴이 설네이고 마치小說의主人公과같이 피가 뛰는것을 억제할수없었읍니다. 그이는 나를 前부터 잘알고있었담니다. 내가 石井先生을 따라 朝鮮公演을 왔을때도 中學生으로求景하려왔었담니다 또 내가 內城에있을쩍에도 電車에서 각금맛났드라구요. 우리들은 어느듯 마음이 合致해서 畢竟은將次 建設할家庭에對한 꿈을이얘기하기까지 되였읍니다. 두사람의 마음이 여기까지 미치게되매 본래 오빠의承諾까지있고했으니 언제結婚해도 관게없읍니다. 父母님께서도 大賛成이였읍니다. 그런데 여기에 不賛成까지는안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라는분들이 멫분있었읍니다.
그이들은 다른 까닭에 그러는것이아니고 藝術家에겐人氣가 生命이라는것이였읍니다. 하나 나는 「結婚해서 凋落하는 人氣라면 그것도할수없다 結婚함으로서 한층빛나는藝術家가되고싶다」 하는 굳은信念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不愉快한 誘惑을 根絶식혀버리고 거기서 完全히解放되여 파트론 云云하는 어려가지 「떼-마」에서 버서나 自由로운 世界를 가질려고했읍니다. 그리하야 結局 나는結婚하게됐읍니다. 父母님께서는 그래도 귀여운 딸이라고 結婚式을 굉장히 하려고했읍니다마는 우리는 그러한 虛禮를 즐기기에는 너무 純眞했읍니다. 더구나 安은 「그런余裕가있다면 당신의舞踊硏究에 使用하는것이조치안소」하고 兩親의提衣를 拒絶해버렸읍니다 그리고다만 「세비로」를 아모러케나입은 新郞과 스포-츠뜨렛쓰를 걸친新婦는 튜령크하나를들고 釋王寺로 密月의旅行을떠난것입니다. 一周豫定한것이 그만 二週日이 지내서야 京城에 도라온 新婦는 幸福感에 가슴이 꽉찻읍니다. 그것이 바로 昭和七年 내가 스므살 安이스믈두살의봄이였읍니다. 結婚後에도 나의硏究生活은 그냥 게속하겠다는 希望은 굳게가지고있었으나 萬一 이것이 家庭生活을 有持하여나가는데, 障害가 된다면 나는 선듯 藝術을 버릴作定을하고있었읍니다. 마는 安의激勵로서나는 다시 마음을 굿게먹고 藝術의길을것기로했읍니다. 일로부터 安이 學校에갈것을쓸쓸히 생각하는外엔 다른 생각없이 정말幸福한生活이였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래 게속되지못하었으니 結婚後三ケ月되는어떤날 安은不意로 요란스레 처들어오警察官에게 붓잡혀간것입니다. 너무도 豫期하지않었든 일은 나를 暗然케켰읍니다. 安은 여러文學靑年들과함께 思想犯嫌疑로 檢束된것입니다. 그러나 슲으다고 그냥 주잔저서 슲어할수는없지안읍니까 準備가 다-된硏究發表會를 開催하었읍니다. 쪼들니고 학대밧든사람이 한번 勇氣를 낼때면 사람보다培以上의힘이나는것이 人間性이든가봐요, 탄력잃었든마음이 긴장되면서 反撥心이 이러났읍니다 그리고 安도警察署에 檢束되여있는몸으로서 늘 激勵해주며 朝鮮各地方에 다니며 公演할것을 勸해주었음으로 나는 마츰내各地方公演의길을떠내게됐읍니다. 客地에서 客地로 不自由한 安을생각하면서 나는 마지막公演인 安東縣에서 公演을 했을때였읍니다. 連日의마음의괴롬과 肉體的疲困으로해서 最終幕이 내렸을때는 그만 녹으라저서 묵어운 다리를 겨우 옴기여化裝室에도라가니 거기엔꿈에도 못있든安이 지금 막 달여온것처럼 서있지안습니까 나는 그만 아모것도 다-이저버리고 安의가슴에 머리를파뭇고울어버렸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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