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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 『재자가인』―영화와 흥망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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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표준화 정보 |
원문정보 |
기사제목 |
장안 『재자가인』―영화와 흥망기― |
長安『才子佳人』―榮華와興亡記― |
종 류 |
좌담 |
座談 |
필 자 |
이서구․복혜숙․김팔련 |
李瑞求․卜惠淑․金八蓮 |
출처정보 |
삼천리 |
三千里 |
연 도 |
1939-01 |
昭和十四年一月 |
면 수 |
106 |
(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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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瑞求
卜惠淑
本社 金八蓮
人氣男兒는누구누구인가
本社金八蓮 지금은 「누구時代」 라할까요 서울안 人氣를 獨차지한, 「長安豪傑」이 누구일가 豪傑이 말이여요 豪傑 란 말이 語弊있다면 才士라해도 조코…
李瑞求-當代야 李鍾萬時代이지
卜惠淑-어느날 新聞에 李鍾萬이 이야기 아니나는날 드물고 舍廊방 大廳방에서 長安甲富 李鍾萬이야기를 아니하눈 곳이없으니 지금은 實로 李鍾萬時代야
金八蓮-李鍾萬의 人氣는 돈있으니까 난것일가?
李瑞求-돈도 이만저만 돈이 아닌 모양이야 鑛山專門家와 다른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드러도 長津金鑛이 年三百萬圓産額이날것이라나 六割은 純利益이라니 年百八十萬圓純益 아닌가 平北잇는鐵鑛도 一億萬噸埋藏量에 評價몇千萬圓 칠것이라니 赤貧如洗하든 사람이 一躍, 뛰면 좀만히 뛰었는가 西에 南阿弗利加의 따이야몬드王 쎄실卿(뒤에 英國宰相된 사람이) 있고 東에 李鍾萬이있다 할거야
卜惠淑-李容翊의 뒤를이은 사람이지, 甲山長津金鑛을 캐여낸것에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큰巨富면서 다떠러진 洋服을 입고 五錢짜리 電車를타고각금 東大門박 貧民窟에 나타나 五十圓도주고百圓도주고 이게모다 賣名이란냄새가 조곰도없거든 정말噫無情에 나오는 장팔찬같은 巨人이야 海王星에나오는 몬테크리스토 伯爵같은 무엔가 神秘할面影이있는분이야 이러니까 저절로 長安人氣가끌어진단말이야
金八蓮-李鍾萬 人氣는 앞으로더 繼續될가
李瑞求-그럴걸 李鍾萬이보다더큰 사람이나와 壓倒하기전에는 아마 獨판 칠게야
金八蓮-李鍾萬前에는 누구일가?
卜惠淑-그야 朴興植이겟지 百貨店을처음 벌렸고 젊은 사람 五六百萬圓의 會社々長로되고 前郡守 前銀行 支配人 前警部하는그럴듯한 部下를 千餘名이나 거느리고게다가, 美男이고 이러니 花柳界에도 人氣있고
李瑞求-요전에도 어느 座席에서이야기났는데 朝鮮선 朴興植이 實業家로는 第一人者야閔大植이니 韓相龍이니 모다 銀行業者로 父祖財産을 그저직히고 않젓지 그러나 現代의 實業家란것은 남의돈잘끄으려 모아서 새 創造的 일 하는데 그生命이있단말이야 그 니 그런點으로보면朴은確實히傑物이거든 年少한 小壯實業家견만 和信을맨들고 무었만들고……아직 世上을 爲해쓴돈이없서 不足하나
卜惠淑-鍾路네거리 和信七層집은 朴興植의 얼골이지 그러니하로에도 여러萬名씩 그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朴을 생각하고 그의말을하게되니 朴興植 人氣는 저, 建物이 사라있는 限 계속할거야
金八蓮-朴興植의 前은 누구일가
李瑞求-그전이될는지 그뒤 될는지잘모르겠으나 孫基禎일걸요지난번新聞에 同德高女 體操敎師와 戀愛하는것을 世界的戀愛라고떠드니 아마「英國윈자公」戀愛以後처음인가 하하하
卜惠淑-글세 난 孫基禎이에 對해서 자미있는 말을들었서 伯林서 各國選手들이 모여 마라손 豫習을하는데 豫習때에도 꼭꼭 一等을 하드래그래서 모다 이야기하기를 豫選에 一等할적에는 정작大會에 나가선 골아떠러지리라고-그런것이 웬걸, 大會서도 超記錄으로 一等을 하고 그러고도긔운이 나마서 그너른 場內를 한바퀴휭돌고,아모리 황소같은大丈夫도 決勝點에 到着하야서는 쓰러진다는데 이걸보고 모다「孫基禎이는 사람이 아니라고」西洋사람들이 그러드래」
金八蓮-다시 올림픽에 孫基禎이 制覇하는날 있을가
李瑞求-明年 東京서 있었더면, 몰났지
卜惠淑-이제는 結婚까지하게되니 精力이 빠저서 어떨가요 어쨋든 웬만한 사람이면 김치깍둑이먹든 사람이 빠 다-찜을 먹고 水陸數十萬里를 般車로갔으면 골아라도떠러지겠는데참용해
金八蓮-孫基禎의 그前 人氣男은 方應謨일가
李瑞求-그러치 崔昌學 方應謨이지 그러나 崔昌學은 제가 富者로 妻妾거느리고 좋은 집쓰고 산달뿐이지, 또 白川溫泉가다가 自動車에떠러저 쓰러젔다느니 하는허잘것없는 市井, 消息은 들니지만은社會人士의 耳目을 당길 아모行事도없으니까 低級의 人氣밖에 차지한것이없지 問題外야그보다 方應謨는 朝鮮日報를, 하는데서 한철의英雄男兒였지
卜惠淑-그러치요 華龍道판 같이 금방협잡꾼손에 너머가든지없어지든지 할것같은그때에이분이五十萬圓 紙幣 뭉텡이를, 그들고 나타나지않었든들 그新聞社는 없어지지 않었을지 모르지
金八蓮-方應謨前은 누굴가 金基德일가
李瑞求-金基德의 人氣도 한때는 相當하였지 滿洲國이 새로 나오는 바람에 北鮮羅津에 큰軍港이 되게되자 섬(島)을가진 王者로 또여러 十圓짜리 百圓하짜리土地여러 百萬坪을 가젔다고해서 야단들이었지 어떤 方面의 調査로만 그때 財産七百萬圓이라고도 하고 三百萬圓이라고도 하였으니까.
卜惠淑-그러치 金基德이도 웬간한 傑物인 모양이더군요 濟州島만치큰지 漢江汝矣島만치 큰지는 모르지만 글세섬을 두개씩이나 가젔고 羅津서잘되기까지는 朝鮮銀行에 五十萬圓인가 百萬圓인가의 빗을질머저 負債王으로도 全鮮에 한둘재갖다고
李瑞求-한동안은 東一銀行을맛는단말도 떠단였지 培材高普를맛는단말도 있었고 이분은앞으로더두고 바야알것이야
金八蓮-金基德의 前은 누구일가
李瑞求-呂運享일걸 呂運享 呂運享하고 좀들떠들었나, 그분이黃海道 어느고을 結婚式主禮次로 갔더니呂運享의 얼골을 보겠다고 禮拜堂않이 人山人海더래
卜惠淑-結婚式 말이났으니 말이지 一年치고 八十件 이라든가 九十件 이라든가 主禮노릇을 하였다는군만 오직하고 新聞社長時代에 主禮社長이란 別號까지생겼을가 上海있을때도 그런 社交的일은 도마터하였다는데 아무턴 明朗하고 爽快한어룬이야
李瑞求-늘 靑年이고- 四時靑年에 세분이있지 尹致昊 申興雨 呂運享 이세분은 밤낫보아도 항상늙은 靑春이야
金八蓮-呂運享의 前에는 누구일가
李瑞求-崔 麟일걸 天道敎의 百萬敎衆을 있글고한때좀 聲勢조왔든가 宋奉瑀말 文字로 山이 움지겨가듯 천천히 것고 누가불느면서는데 五分 뒤도라보는데 五分對答하는데 五分, 이렇게무게있다 하야 孫義庵의 再生같이 敎徒들이 떠들고 社會가,그의 一動一靜을 注目했고
卜惠淑-某女士事件으로 艶聞조차깊었고
金八蓮-崔麟의以前에는
李瑞求-그러고는 太古史가되는데 申興雨時代 李光洙時代 金性洙時代 張德秀時代 崔南善時代 孫秉熙時代 尹致昊時代 이러타 할수있을걸 春園은 當代까지過히 人氣를 떨구지않고 文藝家로서 일홈을 떨치고잇고 金性洙는 東亞日報 全盛時代에 王者노릇으로 그聲譽一世를 덮었고 지금도 普專校長으로 名振四海格이고 張德秀는 東亞日報때가亦是花形時節이엇는데 米國서나와서는 別로 華麗한 舞臺에登場한적이없고 申興雨는 해마다무슨代表로 米國을 奔走히도라단닐적이 조왔고 崔南善은 靑春서부터 新文舘光文會時代가 조왔다가 最近은 建國大學敎授로다시 빛나기시작했고 孫秉熙-尹致昊等 巨物은 더말하지않어도 알일이고
卜惠淑-名妓朱山月로 英雄好色的東洋式로-맨스를 相當히펄치기로孫秉熙도有名했지요.
金八蓮-그러면 朝鮮社會 約二十年內로 그時節 그時節의 人氣男兒를系統을 따저에어보자면 이러하겠구만
孫 秉 熙 時代
尹 致 昊 時代
崔 南 善 時代
金 性 洙 時代
張 德 秀 時代
李 光 洙 時代
崔 麟 時代
申 興 雨 時代
呂 運 享 時代
金 基 德 時代
方 應 謨 時代
崔 昌 學 時代
孫 基 禎 時代
朴 興 植 時代
李 鍾 萬 時代
로지금이바로李鍾萬時代로구만
李瑞求-大體로 그러치 그外에도 登場人物이야 많했지만 大體로 그분들이 人物의 파톤을 서로 주고받고 하야 近世二十年의歷史를 많들어다 할것이지
②人氣佳人들은 누구누구
金八蓮-그러면 이번에는 佳人들 女性들을 歷史順으로 치켜들어볼가 자아 朴仁德이를 出發點으로 하고- 전에 金마리아等이있었지만 여기선 잠간 論外로하지 朴仁德이부터
李瑞求-朴仁德의 人氣는 演說客인데서 있었지총각에게다 치마저고리입힌듯 活潑한 그態度와 억센體格에도 人氣를 끄은焦點이있었겟지만 아무튼 내가 東亞日報記者로 처음 드러왔을 적에 朴仁德人氣는 놀나웠서요 父老들이 딸가지겠거든 朴仁德이같은딸을 나아야한다고
卜惠淑-그때는 나는 橫濱밋숀스쿨에가 있든때인데 朝鮮男女치고 朴仁德이 일홈을 모르는이가 없었으니까 宏壯하였지 더구나 戀愛를 했다든가 離婚을 했다든지 어쩌고 어쩌고 하여서 마치 平塜電子奥ムメオ等靑踏會新女性群같이 當代人氣를, 한몸에 모았지
金八蓮-그朴仁德의以後는
李瑞求-金一葉 金明渟이겠지 그때둘이다 開闢과 新聞에 글을썼는데 각금靑年會舘에 音樂會가있으면 女詩人 金一葉이가, 아래위샛파란 비단치마 저고리로 몸을감고나는듯이 삽분히 나와피아노伴奏할 적에는 長安土女모다 惱殺當햇지 그뒤에도 女子界란雜誌를 내이고 閣牛步等 當代詩人墨客이 一葉의사랑에모히고 黎明期의 이땅情調를 萬人이부러워하는속에서 滿喫한분이엇어
卜惠淑-金一葉이는 그뒤 時調도쓰더니 지금은 아조중이 되어 어느 山속 절깐에드러가서 나미아타불을웨운다드군요
金八蓮-金一葉 金明渟뒤에는
卜惠淑-尹心悳이겠지 梨花學堂敎師를 팽개치고 土月會舞臺에나타나든 그때의 尹心悳이는욕도많이 먹었지만또 한편 그大담한 데뷰-에 새사람들은 이先驅者의意氣를 높이사기도하였지
尹心悳-그 美貌 그才華 그리고 希臘女詩人 삼포-같이 제情熱을미처주체할길없어 狂亂하든 그모양, 악깝고 불상한이였지 時代가 順하였던들 좀더 華麗한 저伊藤白蓮이같은 그런길을 밟았을것을死의讃美와情死! 그때情死一件이 엇더케나 社會에衝激을 주었든가
金八蓮-그러구는 누굴가 尹心悳의 다음은?
李瑞求-李月華야 梨花學堂다니다가 그만둔 인테리로아마 多情多恨한椿姬같은 女性의 標本이였지 그는 電車에서 도비노리도비오리를 일수로잘했지요 胡蝶같이 깡둥뛰여 오르고내리고
卜惠淑-그러치요 李月華도 아까운이였지 上海가서 딴사-로도있었고 그의 가슴속에 情熱이 덜했든들 아마 女學校敎師랍시고 一生을 보내슬터인데.
金八蓮-李月華 다음에는
李瑞求-權愛羅지 黃眞伊가난 開城이그故鄕인데 서울靑年會舘서 講演하다가 朝鮮것을 웨업새버려요西洋것만 文明인가요 하면서 「開城難棒歌」한 마디잘빼었지 一種女流運動者 타입이었어요.三伏에 다닐적엔 아래위를열새배 치마저고리로휘휘 감고
金八蓮-權愛羅도 有名했지 그러고는
卜惠淑-그제부터야 登場하는 女性이많고 이구통이 저구통이에서 로-맨스와 所聞이 마구쏘다저 나왔지 그때 한時代를이룬이들이 槿友會一派일걸요 丁七星 鄭鍾嗚 黃信德 許貞淑, 沈恩淑 姜石子姜아근니아 모도다 錚錚한 패들이었지요.
李瑞求-그럴걸요 女性運動者들의 全盛時代이자 時代潮流도 이분들을爲해서 모든 舞臺와機會를드렸지요 이러케 槿友一派의群雄割據的 물결이 한바탕 휘-지나가자 그다음에 登場한 이가 「申一仙」이였지요 申一仙이같이 「朝鮮의愛人」노릇을 한이가 近代史중에는 없을걸요.
卜惠淑-그러치요 巨匠羅運奎가, 끄러내어 映畵「아리랑」을 만든뒤로는 朝鮮에 金剛山과 申一仙이名物이되었지요. 天徒敎堂이나 靑年會舘에 音樂會가있으면 申一仙이出演한다면 언제든 滿員이었지요. 그러든 색시가어쩌면 妓生으로 또 지금 소문에는, 저 딴길를발버 옛날의 名聲을 즛밟고마다니 참 可惜한일이여요
李瑞求-非端 申一仙이에만 하는말이아니라 大體로女子란 젊었을때는 그저 美貌와 아름다운 자태로 그名聲을 維持할수있지만은 그러나 나이들면 그때는 敎養의 힘이아니고는 到底히 人氣를 유지해갈수가 없거든, 그런데 申一仙이야 同德高女인가 어덴가 다니다가 말고 그뒤도 修養을 아니하니 轉落할밖에別수있어야지 朝鮮女子 大多數의 運命이야
金八蓮-申一仙이 다음에는
李瑞求-또 한번 混亂時代群雄割據時代가왓지 그때는 朝鮮에新劇도勃興하고 映畵와- 더구나 레코-드가 티여나와 많은人物이 쏘다저 나왔지요. 爲先여기안즌 卜惠淑氏, 이女士는 아버지가 牧師요 저는 橫濱밋숀스쿨에다니면서 東京留學生의土月會劇團에 뛰여들어 女優로서 舞臺를 밥기시작한뒤 그行狀이多彩하였고 그러고 레코-드에는 鮮于一扇 王壽福等等 수두룩하게 쏘다저나왔지요.
卜惠淑-그러다가 다시한번 慧星的으로 世上을 壓倒하면서 나타난이가 저崔承喜일걸요
李瑞求-그러치 朴仁德時代로부터 現代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도더 만흔喝采를 받으면서 登場한이가 崔承喜였지요.
卜惠淑-이제 倫敦巴里를 휘-돌아 다시 조선에오면 또다시한번일홈을 날닐걸
金八蓮-그러면 現代는 누구의時代일가요
卜惠淑-文藝峰일걸
李瑞求-「나그내」,「春香傳」의映畵에서부터 斷然 文藝峰이女王으로 君臨하고있다고 보아서옳겠지韓銀珍도 조타고하나 아직은 스크린에올은 적없어 未知數이고.
卜惠淑-누가무에라든지 崔承喜以後에는 文藝峰이겠지요 그東洋的버들입같흔타입이조와요.
金八蓮-그러면 지금말슴한것으로 歷代의 人氣女性을 順序대로 처들면 이렇하겠구만
朴人德時代
金一葉 金明渟 時代
尹 心 悳 時代
李 月 華 時代
權 愛 羅 時代
丁七星 鄭鍾嗚 時代
申 一 仙 時代
鮮于一扇 王壽福,卜惠淑時代
崔 承 喜 時代
文 藝 峰 時代
③서울名妓들은
金八蓮-서울 名妓는 누구일가, 맨처음 出發을 裵貞子로부터 시작이하지 裵貞子에대해선 世上이대개 짐작하기 그다음분으로요
李瑞求-裵貞子 다음엔 海棠花라더구만 平壤妓生인데 大正四年 共進會당철에 아조 일홈이 있었다네
卜惠淑-그러고저 제병이란 妓生도 有名하였대요 제병이란게, 벌명인데 청국비단에 아조갑는것으로「제병」이란가음이 있었대요 이妓生이 어떻게 호사를 하였는지 그제병이란 비단으로 아래위를 칭칭감고 이부자리도 방에깐 방석도, 모다비단으로 만하였대서 제병이라고한다더군요 요지간드르니 金剛山에 드러가修道하는 어느博士를 차저가있다더군요.
李瑞求-그러고는「茶洞총채」일걸요
金八蓮-「총채」라니 무슨뜻인가요
卜惠淑-茶洞이란것은 그가서울서茶房골에 살았기에 茶洞이요 총재라니 그녀편네가 어떻게나 말을잘하고 수다스러운지 그래서 그렇게총제라 부첬다는구만
李瑞求-말하자면 茶洞총채는 上流社會人士와 아조 交際를잘하였다는구만 그런데서 有名하여젔지 총채 다음이 저 有名한朱山月이겟지
金八蓮-朱山月이야 孫秉熙 그분의愛妾이 되었으니깐 有名하여지지않었는가요.
李瑞求-아니지요 그 當時名妓로 長安안을 눌넜지 그러기에 孫義庵이 一等名妓를 떼여드려 갓기에 더 一層有名하여젔지요.
金八蓮-그러고는
卜惠淑-그 다음에는? 白雲仙일걸일홈을 누가잘지었지 白雲仙이라고, 이분은 소리잘하고 人物이뛰여나고 한동안 長安豪俠男兒를 꽤울렀지 거문고는 卓文君만치 나 잘하였고
李-白雲仙이를 지금도 이저버리지못해서 中老들이 각금舍廊에서 탄식하는 소리를 드렀어, 白雲仙의뒤가 玄桂玉, 丁琴竹, 姜香蘭이겠지
그대가바로 大正八年前後지 玄桂玉이는 玄이란 사내따라 上海로다라나섯고 丁琴竹은 丁七星이로서일홈을 고치고서 女性運動者가되엇고姜香蘭도 姜石子라고 일홈을 고치고삼단같은머리를 잘나버리고서 朝鮮最初의 斷髮娘이되어 女性運動에뛰여들었지요 참으로 豪華로운시철이었지요.
卜惠淑-그러치요 그한철이 아마 가장 멋지고 女子의 人氣가가장끌던때 일걸말하자면 女子가더구나 妓生이 노리개같은 時節에서 뛰여나와 人形의집을 나온노라같이 自覺하든 시절이라할걸요.
李瑞求-이러한 特別한 타입의妓生이한바퀴-휘 지나간뒤 그다음에 登場한이가 吳素紅이라고 있었지 東京留學하고 도라와서 妓生 노릇하였는데 苦學生들學費를 대여주고 퍽으나 감춘 뜻이있든 女子갓했어요 지금도, 上海가서 딴스홀인가 빠-를經營한다 하더군요.
卜惠淑-다음이 康明花일걸 毒藥마시는 女子인것만치 性質도퍽强하기도 하였겠으나 그시절 동무들 이야기를들으면퍽으라 熱情的 女子라더군요.
李瑞求-얼골곱고 熱情的인데다가 百萬長者의 아들 張炳天이와, 情死까지하고 났으니까 더욱그일홈이 높젖지요 한동안은, 康明花 이야기가 서울판안을덮지안었든가.
金八蓮-그러치 康明花와 朱山月이둘이모다시골에까지 널니소문을낸 女性이었지 그러고는 ?
(중간에 한 쪽이 없음)
金八蓮-이번에는 話題를 돌려서 長安에有名한 百萬長者라거나아조높은 사람의 邸宅을 求景한 일이있어요 그이야기나 하구려
卜惠淑-나는 權門貴家에 가본적은없지만몇해전 妓生으로있을적에하로 저녁은 南山莊에서 불느기에갓더니 그날이바로 崔昌學이가三成金鑛을 一百三十萬圓엔가 얼마에팔기로되야 契約을 成立하든날이 더군요 그때 東京서 鑛山會社 支配人이라고하는 무슨 大學나온 靑年이한편에안고한쪽에는 崔昌學이 안저서 서로 契約書에 署名하는光景을 보았는데암만 大學나온이라도 그靑年은 百餘萬圓짜리契約書에 署名할적에손에 쥔붓자루가 후둘후둘 떨니더구만요 그런데 崔昌學이는 泰然하게안저 제법 제일홈석자만은 휙휙갈겨 잘써넘기더군요. 남들은 無識하다고 숭을보아도난그때보니까 사람이 아조大膽하더군요.
金八蓮-그거자미있는 이야기구만요또百萬長者와 점심을같이 먹엇거나 그집 求景한일이없어요
李瑞求-東大門박 林宗相집을 한번 차저가본적있었지아마 東亞日報記者 時代인줄 記憶하는데 그때 내 記憶으로는 邸宅은크고높고 宏壯히 너르지만 모든調度品이 놓일데 노여있지 안어서 좀 엉성하더군요. 林宗相-이라면 그때는 참으로 멫재안가는 큰 富者엿지
卜惠淑-나도 아조 어릴때에 朴泳孝侯爵집으로 가본일이있어요 侯爵의 孫女든지 일가든지요. 나와같은 女學校에 다닌일이있엇지그애따라 각금놀너갓는데 宮闕같은 큰집에 구름다리(虹橋)까지 하여있고 어머어마하드군요
金八蓮-그러면 한번 話題를돌려서 서울서 結婚式을 豪華롭게 한이가 누구일가.
卜惠淑-潘福昌일걸 恒相潘次郞이라고하지요 米豆을하여 三十萬圓인가 하는 富者가되었는데 富者되고나서 첬政치가 큰집짓고 좋은 색시에장가 든다는것이엇지요. 그래서 仁川海岸에다가 阿房宮같은 굉장한 큰 집을짓고 그러고는 新婦를골났는데 서울올너와서 各女學校를 죄-다뒤젖거든 그중에서 京城女子高普에다니는 後童이란 處女를골났다는구만이 後童이가 누군가하니저有名한 苑洞 짜겟트의바로 兄이엇지요 나도보았는데얼골이그냥 꽃이야요 참말美人이거든
李瑞求-그러치 나도 보았는데仙女갓했어요 그女子가 조선서처음으로 치마끄트머리에 繡를 노아입었지 그女子가 시작이엇서 後童이는 바요링도잘했지 潘福昌의結婚式에는 仁川서 紳士多數가몰려오고 朝鮮호텔에서 하였는데 仁川府尹이 祝辭도하고 떠들석하였지.
金八蓮-그러고는
卜惠淑-愼容郁(容인을改名)이가,
飛行機우에서 結婚式한것도 豪華로웠고 崔昌學이 昨年엔가, 京城호텔서 結婚式을 하였는데 朴榮喆이 主體하고 大官富豪들이祝辭를하고 그도한때 話題꺼리였지요.
李瑞求-나는豪華로운 結婚式을한이로는 金性洙가 第一인줄알어 그때는 朴泳孝가 社長이고 金性洙는 東亞日報의 社主로있든 때인데 社會의여러名士로 結婚式準備委員을내고 式은 公會堂에서 하였는데 場內가 花環으로 가득차섯고 總督府로부터도 各局長들이 나왔었고 長安名士도 數百이 參席했고 참으로 버젖하였지요.
金八蓮-이제는 너무 話題가길어지니 마즈막으로 두분이서울서가장 幸福스러운 戀愛結婚의 家庭 열家庭씩만 드러주서요.
李瑞求-그거어렵구만 戀愛結婚家庭에는 흔히不幸과 風波가따렀기에 指名키困難하구만 그러나 몇가지 드러볼가요.
1, 張德秀와 朴恩惠의家庭
2, 金性洙와 李愛主의家庭
3, 文藝峰과 林仙圭의家庭
4, 東京것이나 모던 日本社長 馬海松과 舞蹈家 朴外仙의家庭
卜惠淑-나도 몇家庭드러보지
1, 이러쿵저러쿵하여도 李光洙와 許英肅의家庭
2, 安基永이와 金顯順의 家庭
3 桂貞植의 家庭
4, 柳致眞이와 沈在淳의家庭
두루 이러할걸요.
金八蓮-자아 그럼 여기서 끈칩시다, 新年새해에 福많이 바드서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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