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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구분 표준화 정보 원문정보
기사제목 가야금 伽倻琴
종    류 논문 論文
필    자 장인식 張寅湜
출처정보 여성 女性
연    도 1940-11 昭和十五年十一月
면    수 58 58
기사

朝鮮의 雅樂을 가르처 東西에 冠絶하는 最高最崇의 典樂 東洋音樂의精髓, 燦爛한 古代朝鮮의 오직하나의 文化藝術의 遺産이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榮光의 그늘에 八音으로 일흠불리는 일은바金·石·絲·竹·匏·土·草·木의 오늘엔 겻고 褪色하였을망정 그러므로 보담 尊貴하고 한겹豊麗한 왼갖 雅樂器가 있는것을 잊을수없읍니다.
高雅優美한旋律, 靈秀端正한節奏, 音樂的感性에 가장 뛰여났던 우리先祖의 生活과感情, 그리고 呼吸과 脈膊이 고즈넉이 담겨있어, 綿綿히 傳하는 雅樂을 피리·笛ㅅ대아닌 남의樂器에 언는다고하면 그것은 이미 雅樂일수 없겠습니다.
音調도 音調려니와, 우리는 있때인 한 曲調의 가락을 듣기앞서, 갈대청떠는 져(大笒 소리, 文絃을 술대(匙)가 건듸리기도前에 슬기두둥하는거문고의 으뭉스런 音色―게서 벌서 朝鮮雅樂을 感覺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東洋音樂에있어 가장 오래고 찌든 歷史를 가지고있기는 말슴할 것도 없이 支那와 印度입니다만은 모다 現在는 衰微하여 돌아볼길이없이 되었고, 中에도 支那는 時代의變遷, 民族의 盛衰로 古來의樂은 거의 볼것이없이 湮滅되여, 찾을길이없는것에 돌이켜 홀로 우리朝鮮많이 多少의 消長이 없는 것이 아니더라도, 잘 古來의바탕, 古來의樂器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것은이 크게 자랑닐수없읍니다.
現在, 李王家의 保存되여있는 樂器는 都合 六十四種으로 東洋에 있어서의 歷史的인 樂器는 擧皆 모두아있다고 할수가 있읍니다.
그것들은 오늘의 音響學上 構造로보아 或은 未備하고 完全치 못한것이다 손접더라도 그樂器들이 갖은 變化많은音色, 多彩한表情은 그類例를 흔히하지 않는것들이요, 뿐아니라 그 外形에 있어서도 龍紋·鳳雀等의 아름다운意匠의 裝飾이랄지 새록새록의 그럴뜻한 形狀을 갖은것으로 매우 興趣깊은 것입니다.
이제 말슴하려는 伽倻琴도 그中의 하나로, 저 高句麗의二相 王山岳이 製作한 玄琴과 아울러, 朝鮮獨創의 構想으로 實로 朝鮮樂器中의 가장 高尙한 代表的인 樂器인것입니다.
玄琴과 伽倻琴은 늘 倂稱되는만큼 鄕樂器의 雙璧이기도하려니와 그音色에있어도 玄琴이 男性的으로 雄壯·豪放·粗野하다면 伽倻琴은 女性的으로 優美·華麗·纖細하여 어느것으로나 對照的인 特色있는 樂器입니다.
伽倻琴은 그音色이 너무 淸澄한탓으로 玄琴과가치 比較的 包擡性은 적으나, 그反面 자칫하면 低淺하여 哀調 지나치는 雅樂에있어 어느때고 明朗과 輕快를 이바지하는것은 伽倻琴의 特色에서도 特記한 特色이겠읍니다.


新羅古記에 「伽倻琴伽倻國嘉實王 見唐之樂器而造之」라하였고 三國史에 또한「伽倻琴亦法中國雅都箏而爲之」라는것이 보힘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對하여 매우 見解를 달리하는것으로 堂堂한 우리의 創作을 가지고 이토록 謙讓하지않어도 좋지않은가하고 憤慨조차 하는것입니다.
「玄琴은 象中國雅都琴而爲之」이고, 大笒 또는 「模倣重笛而爲之者也」에 이르러서는 故意나 아닌가, 三國史記等의 編者에 疑念을 지니게까지 하는것입니다.
이렇듯 卑下하는 어리석도록 正直한 心性은 朝鮮以外의 民族으론 드믄일이라할것입니다.
무었에서 暗示를 얻는다는것은 模倣이아닙니다. 伽倻琴이 버젔한 朝鮮 伽倻國代의 尊嚴한 嘉實王의 御作이심을 헐(毀)는 어느說에도 우리는 敢然히 抗議하는 者입니다. 玄琴·大笒이 또한 同斷일것은 呶呶할것도 없는 일이겠읍니다.
伽倻琴은 嘉實王의 御製시때 不拘하고, 이것의 大師匠, 于勒이 樂聖에 追仰됨은 一種 奇異한感을 지니게 하는것이있읍니다. 그야 御作者이시라하여 곧 樂聖으로 稱頌할수는 없으나 그러면 于勒은 眞實로히 大音樂家였다는 아모라도 首肯함을 얻을 業績이 있어야 합니다.
天縱之資質로 許多한 作曲이 있고 伽倻가 亡하매 新羅에 投降하여 그技藝를 나누고, 伽倻琴을 後世에 傳하게한 于勒의 功勞는 事實 宏大하지 않은것이 않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背後에 新羅眞興王의 藝術的인 理解와 支持를 더높이 評價할것이라고 봅니다.
「伽倻王淫亂自滅而樂何罪乎」라하야 伽倻琴을 亡國之音이라 獻議한 諫巨의 俗說을 一蹴하신 王의 見識은, 놀라우신것이아니면 아니됩니다.
그點에있어 眞興王은 孔子의 所謂 禮樂思想과는 매우 距離가 있은듯 生覺됩니다.
伽倻琴을 造之하시고, 以謂諸國方言이 各異하니 聲音이 豈可一哉라하신 嘉實王의 睿感이 없었든들, 英才의 于勒으로도, 그일흠은 一代에 끝이고 말었을것은 贅言할것도없는 일이겠읍니다. 따라서 新羅眞興王의王權으로서의 保護獎勵가 크게 伽倻琴에 精彩를 더했고, 于勒의 名을 不杇의것으로 만들었읍니다.
樂聖 于勒의 그늘에 두분王의 音樂에 蘊蓄을 極하신, 聖鑑을 뵈옵는것은 實로 誠惶스런 일입니다.


「王山岳·于勒의兩樂聖 모다許多히 樂曲을 創作하고, 이를 第子에게 敎授하였다고하니라. 然而, 可惜한것은 그것이 至今에 遺傳하지못함이라」
이것은 李王職雅樂都編「朝鮮樂大要」의 한 대문입니다.
不世出의 大樂才들이 精魂을 기우려 어떻게 乏絶·靈妙의名曲을 作品하였을까는 想像할 것도 없읍니다.
嘉實王이 伽倻琴을 지으신後 樂師, 省執縣人, 于勒을 命하사 樂曲을 創作하여보라하시니, 于勒은 硏究未幾에 十二曲을지여 獻上하였읍니다.
于勒所製의 十二曲名은 이러합니다.
一曰下加羅都, 二曰土加羅都, 三曰實伎, 四曰達己, 五曰思勿, 六曰勿彗, 七曰下奇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奇物입니다.
그러나 現今의 어느한曲도 傳하지못하는것은 큰遺憾이 아닐수없읍니다. 但只 曲名만으로 推察하건대 于勒所製曲名一, 二는 加羅의地名을 取한듯 九, 居烈도 居昌都의 新羅古名 居烈郡(或云居陀) 十, 沙八兮도 尙州의新羅古名 沙伐을 採한것이리라한 小倉博士의 解題는 그대로 信憑하여도 無妨하겠읍니다 더욱 博士는 四達己는 닭일께요, 八의師子己는 獅子의曲이있었으리라하고, 曲名을 動物名에서 가저온點等, 많이 通俗化한 俗歌, 卽新羅固有의形式에 若于唐律을 가춘듯이 생각된다하고 于勒이 처음 三人의 門人에게 十二曲을 傳하려하매, 저들이此曲을評하야 「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이라하야 一時 于勒의노염을 산것같은것도 這間의消息을 말한것이리라고, 說破한것은 아모라도 首肯할수있는 滋味있는觀察입니다.
新羅眞興王二十三年 (西紀五六二), 伽倻國이 及其也 新羅에倂呑되매, 于勒은 樂器를 지니고 眞興王에게 投降하였읍니다. 이點에 關하여는 褒貶이 한결같지 않을것으로, 祖國의 存亡之秋이든 모름즉이 사나이 樂器건 무었이건 槍劒 弓矢로 박구어 國恩을 갚을것임에도 于勒이 그를敢히하지 못했음은 伽倻琴을 千秋에나린 빛나는 功業이 그에게 있더라도 조금遺恨事임을 어찌할수 없겠읍니다.
그러나 伽倻 이미 亡해도 伽倻琴이 新羅에서 光華한것은 一念 藝術에뿐 殉한 于勒의 世間的인 毁譽에 介意치않은 高邁한 精神에 말매아믐 이겠읍니다.
眞興王은 이또한 原禮로서 于勒을 國原에 安置하고, 大奈麻注知와階古, 大舍萬德으로하여금 于勒에 師事케 하였읍니다. 注知·階古·萬德은 셋이 모다 出藍의 大器이였든싶어, 于勒으로부터 이미十二曲이 다 傳授한뒤에 서로 議論하여 일으되「此繁且淫하니 不可以爲雅正」이라하여 드듸여 그것을 要約하여 五曲으로 만들어 놓았읍니다.
于勒이 처음 듣고는 大端히 怒하더니 그五曲의音을 듣고나서는 流淚歎息하여 가로대「樂而不流하고 哀而不悲라야 可謂正也니 爾其奏之王前하라」하였읍니다. 드듸여 弟子에게 讓步한것이였읍니다.
眞興王이 이를 들으시고 大悅하시되 亡國之音이도니 不足取也니다하는 臣下의 諫言을 制止하시며 伽倻王이 淫亂하여 自滅 함이어든 音樂이 무슨罪라하시고, 무릇 聖人이 音樂을 따련하심에 人情을 緣由하여 써樽節을삼고 나라의 理亂이 헛되히 音調에 있지않다 하시사 이에 大樂을 삼으었읍니다.
古記에는 于勒의 十二曲以外에, 泥文所作의 三曲名을 아울러 傳하는데,
一曰烏, 二曰鼠, 三曰鶉으로 모다 動物의 일흠인것은 于勒의것과도 一脈 通하는것이 있는것으로 興味로운 것입니다.
뒤에 伽倻琴全曲이 百八十五曲이나 일우웠는데 이것을 調別하면 河臨調·嫰竹調의 二調에 分類한다 하였읍니다.


伽倻琴에 類似한 樂器로, 支那의瑟과 箏을 들수있는데 瑟은 體重하여 그調律이 難澁하고 音色이 貧弱하며, 十五絃 箏은 그보다는 조금 簡略하게 되였으나 上崇下平이라하여 頭都는 廣厚하고 尾端은 傾斜가되여 도모지 正坐하여 彈絃하기가 매우 非便하게된 樂器입니다.
그러나 伽倻琴은 그模樣이 첫째 端雅하고 輕便하게 되였을뿐아니라 構造가 精密하고 表情이 佳絶한데다가 무었보다도 彈法이 順理하게 되였읍니다.
더욱 伽倻樂은 琴이나 玄琴 箏等이 모다 그前面과 後面을 다른나무를 接合하여 製作하되 伽倻琴에 限하여는 桐木을 그대로內部를 穿鑿하야 共鳴體를 삼은것입니다. 通長이 五尺四寸, 廣이 八寸五分, 頭端의 擔棟에 絃을 버틔어 尾端 魚鯺形의 羊耳頭에 매여두게 되였읍니다.
絃은 十二絃인데 每絃間이 約六分쯤 떨어젔고, 第一絃, 武絃이其中굵고漸次가느러젔읍니다.
按絃하는法은 左手로 棟後를 눌러, 棟의搖動을 防止하며, 右手指爪로서 擔棟下로 絃을 彈之하는것인데 一時에 二音乃至三四音을뜻기도 하게되였읍니다.
第一絃으로부터 倍聲(低音)三 正聲(中音) 五, 淸聲(高音)四로 伽倻琴의 全發音은 무릇 三音城에 걸치는데 調絃法의 異同으로 若干 相違가 있기도합니다.
伽倻琴은 新羅以後 高麗 李朝의 鄕部樂(朝鮮樂)에 使用하여 現在에 이르는데 宮中宴饗 또는 呈才(宮中舞) 歌樂이 伴奏器로서 有名합니다.
伽倻琴은 非但 朝鮮에서뿐 行世함에 끝이지않고 이미 奈良朝時에 日本內地에 波傳하야 新羅樂·百濟樂等에 使用되였고 그일흠도 新羅琴이라 하였읍니다
現在도 弘仁年間의 新羅琴(伽倻琴)이 正倉院御物로서 保存되여 있읍니다.
伽倻琴의 異型으로 散調伽倻琴이 있는데 이것은 伽倻琴에 比해 形體가 좀적고 棟(雁足)은 도리혀 若干 높읍니다. 南道特有의 唱樂伴奏를 便케하기爲한 必要에서 生起한것인데 別般 創意와工夫를 볼수없고 그年代도 그리오래지못한것입니다.


伽倻․新羅․高麗에 亘하여 于勒과 그의門弟말고 伽倻琴의 名人巨匠은 無數하였을것이로되 어느部面보다도 疏漏한것이 音樂인데다 더욱 文獻的으로 整理가 채되지못하여 일흠나마도 여기에 記錄할수없는것은 섭섭한 일입니다. 李朝라고 樂人의 叙述이 詳細한것은 아니나 그래도 十指를 꼽을수있는 伽倻琴의 名手를 傳하는것만도 고마운일이아닐수없읍니다.
惶恐하압시게도 世宗大王, 世祖大王께옵서 禮樂을 尊崇하사 一般樂政을 整理하시고, 古樂復舊에 御意를 머무사, 親히 數多한 作曲과 歌詞가 게시고, 樂譜의 編纂等實로 今日의 朝鮮雅樂이 오로지 世宗․世祖時代에 그基礎가 確立하여진것은 이제 再言할것도없는 事實이나 또한 世宗大王, 世祖大王께서는 音律에 曉通하실뿐外라 器樂에도 능히 一家를 일우사 世宗大王은 玄琴을 善彈하시였다하며 世祖大王은 大笒을 善吹, 伽倻琴을 善彈하셨담은 무었보다도 伽倻琴의 큰자랑이겠읍니다.
庶民으론 許語繼, 李勝連, 徐益成等이 모다 世宗朝時人으로 伽倻琴의 名手들이였읍니다. 中에도 李勝連은 後日 世祖대왕의 寵愛를 拜手하여 時時로 御前奏樂의 光榮까지 浴했다고하는것입니다.
다음 成宗時에는 金大丁, 李爾知, 權美, 張春等이 모다 伽倻琴界의 錚錚한 流들이였는데 그彈法이 簡嚴하기로는 大丁을 꼽았고, 要妙한것으로는아모래도 爾知이라하여 各■其極이였으나 權美, 張春은 둘이 그域에까지는 일으지못했으나 相當한 演奏家들이였읍니다.
金大丁은 早誅하여 別로 傳치못했으나 李爾知는 士林間에 極尊崇拜되야 傭齋(成俔), 希亮(盧公弼), 子珍(宋琛)等이 모다 그에게 나아가 伽倻琴을 學習했고 爾知死後에도 其音은 世間을 風靡했다고합니다.
近代로는 哲宗朝時樂師의 金宗男, 金宗杓, 高宗朝時 權付典樂의 金宗錫, 第三世雅倻師長 明完璧등의 諸先生이 伽倻琴의名演奏者로 著名합니다.
伽倻琴의 現役으로는 當部雅樂手長 金永胤군, 雅樂手의 李昌奎君等이 銳意 奧藝琢磨에 懸命하는터로 明日의 斯界의 巨匠을 期하고 있읍니다.
그들의 資質과 努力은 充分 우리의 囑望에값할것이리라믿어 疑心치 않읍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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